오늘 보름달이 둥그렇게 떴습니다. 보름달을 보니 매우 반갑고 심안이 편안해집니다. 보름달을 더 즐기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낮에 태양을 쳐다보기는 힘들고 거북하지만 달은 계속 쳐다봐도 괜찮고 볼수록 더욱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리고 달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함을 느낍니다. 오늘이 지나면 보름달도 기울 것 입니다. 달을 보니 친구 생각이 유달리 많이 납니다. 또 달을 보니 동양 사상이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아 마침 공부하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 펜을 들었습니다.
동양에서의 국가론과 국가의 본성은 서양과 다르다고 지난 편지에 적었습니다. 특히 동양사상에서는 서양사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는데 음양오행설입니다. 하지만 오늘 편지에서 음양오행을 설명하기가 여의치 않고 또 나의 학문이 미천하여 적지 않으니 널리 이해 바랍니다.
동양에서 성리학의 최고 대가는 주자입니다. 퇴계 선생이 쓴 성학십도에 주자가 ‘서명’을 논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乾)을 아버지로 삼고 땅(坤)을 어머니로 삼는 것은 모든 생명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작은 몸이 혼연히 살아 있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우리 人間을 말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같은 배속에서 태어난 형제와 같고 만물과 나는 더불어 사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내 부모의 종자이고 大臣은 종자의 가상(家相)이라 하였습니다. 결국 동양사상에서의 국가는 하늘과 땅과 그 사이의 인간 그리고 인간을 다스리는 임금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임금은 당연히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지요. 서양과 같이 몇 가지의 정체로 나누는 것은 없는데 굳이 나누자면 군주제이고 일단은 그 한 가지 정체 밖에 없다고 봐야겠습니다.
이것이 동양사상에서 바라본 국가론의 대략입니다. 동양사상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국가의 본성이나 형성은 우주와 자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는 그 근거가 물의 이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맹자의 고자장구편에서 인성이 선하다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으니 선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래로 흐르지 않은 물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노자의 上善若水(상선약수)와 같은 맥락입니다. 노자가 말하기를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고 서로 타투지 아니하며 만물을 이롭게 한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라고 하였지요. 결국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맹자는 다만 물의 본성은 선하지만 가끔 급하거나 탁한 것은 그‘기세’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예컨대 거꾸로 물이 치솟은 것이 그러하며 또 물이 황토색이 되는 것은 흙을 만났기 때문이지 원래 물의 본성은 선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맹자가 노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양에서는 자연과 우주를 언급하지만 주로 신에 근거한 논의가 많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가 신에 근거한 논의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성서에 말하는 신과 그리스 로마(신화)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성서의 창세기를 인용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회를 만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라고 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나 자연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로크는 내가 보기에 홉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고로 자연상태와 계약에 대해서는 홉스가 먼저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내가 보기엔 홉스가 더 위대한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동양사상의 입장에서 국가론을 말씀드리려 한 것이 길어 졌고 게다가 두서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치고 다음에 다시 편지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이 많아서 자주 편지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점 백분 양해를 구합니다.
가을이 오면 붕새는 구만리를 날아 남명으로 날아간다. 붕새는 끝이 보이지 않는 큰 몸집으로 삼천리를 박차고 올라 거대한 바다 위를 비상한다. 그러나 뱁새는 구만리는커녕 구십 리도 날지 못하고 겨우 쑥대밭 사이를 오가며 붕새를 비웃는다. 자네와 나는 쑥대밭의 뱁새가 아닌 남명으로 나는 붕새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하네. 그래야 넓고 넓은 세상의 구석구석까지를 잘 볼 수가 있겠지.
나는 요즘 퇴계 이황의 ‘자성록’을 읽고 있다네. 자성록은 스스로 돌아본다는 뜻의 서책이란다. 이 책을 통해 퇴계 선생의 인품을 엿볼 수 있고, 그의 사상도 접할 수 있으니 한량없이 기쁘다네. 조선 오백 년 역사에서 퇴계 선생만큼 위대한 학자도 없을 거라 생각하네. 게다가 그의 학문하는 자세와 방법을 다소나마 배울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라네. 자네는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네.
요즘 장안에 화제가 무언지 잘 알고 있겠지? 안철수라는 사람이 화제인데 언론에서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네. 이른바 ‘안철수 신드롬’은 안철수가 잘 나서 그러하기보다 기성정치에 그 만큼 신물이 난 거라고 봐야겠지. 그 지긋지긋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라는 낡은 정치 구조가 깨어 질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게지. 이렇듯 장안의 민심과 정치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곧 지방에도 변화가 온다는 것일세. 자네가 의원으로 일한지도 여러 해가 지났네. 차제에 곧 있으면 자네 나이도 지천인데 이 가을에 몇 가지 당부를 드린다네. 당부라고 하여 거창한 역사의식과 철학을 가지라거나 민족의 통일문제를 늘 고민하라는 것은 아니라네.
첫 번째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책에 대한 것이네. 자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은 폐족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공부밖에 없다고 하였네. 그래서 십팔 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오백 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지. 또 치열하게 독서한 결과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일화가 있다네. 다산 선생 뿐 아니라 퇴계 선생은 독서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병이 나고 말았네. 하지만 일흔 까지 살았으니 그 당시로 보면 장수한 셈이지.
그러니 가을은 물론이고 항상 책을 가까이 두고 틈나는 대로 열심히 읽어야 할 걸세. 올봄에 선물한 플라톤의 국가, 홉스의 리바이어던 그리고 맹자를 꼭 완독하길 바라네. 그래서 만추가 되면 동산에 올라 플라톤과 홉스와 맹자를 한번 논해보자고. 두 번째 당부는 얼굴 내미는 행사나 모임에는 그만 가는 게 좋겠네. 자네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고 싶거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네. 아날로그 정치에서 디지털로, 디지털 중에서도 스마트 정치로 변화하고 있다는 걸 꼭 일러주고 싶어서네. 그리고 신문이나 책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네. 그렇게 함으로 행사나 모임에 힘을 소진하는 일을 줄이게 되니 얼마나 생산적이고 유익한가.
그리고 자네는 툭하면 집행부 공무원을 만나러 간다고 하더구나. 공무원을 왜 저녁에 만나야 하나? 현안에 대해서 궁금하거나 자료가 필요하면 낮에 의회에서 만나 처리해도 될 것을. 아무튼 불필요한 시간을 가능한 줄이라는 말일세. 세 번째는 지역주민들의 불편한 점이 없는지 몸소 살펴야 할 걸세. 동네 마을버스 노선은 문제가 없는지. 입시에 지친 청소년들의 놀이 공간이 얼마나 있는지, 또 노인들이 쉴 곳이 충분한지를 발로 걷든지 자전거를 타든지 지역 형편을 자주 살펴야 할 걸세. 마지막으로 시의원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걸세. 지난번에 전직 시장 한 분을 만났는데 시의원을 두고 하는 말이 “그 사람들 한량 아니오?” 그 분이 어떤 감정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들로부터 한갓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네.
지난 번 자네 집에 법학과 행정학 책이 여러 권 있는 걸 보았고, 가끔 읽고 공부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매우 기뻤다네. 시의원이 반드시 법학과 행정학을 전공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조례도 제정하고 행정부를 감시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특히 자네를 우습게 알지 못하도록 말일세. 이제 안철수 이야기로 그만 편지를 맺을까 하네. 일전에 안철수 아버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단다.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이 안철수는 책벌레였다는 사실이란다. 나는 그 인터뷰를 보고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단다. 책을 읽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킨다거나 세상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사술이 아닐까 싶다. 부디 이 가을에 책을 읽고 행실을 가다듬어 헌신적으로 일하는 나의 친구가 되길 진심으로 빌어 마지않는다. 두서없는 난필 이해바라며...
‘신의 조각상에 소변을 보고, 표준관념을 깨뜨리는 것’보다 더한 파격을 실천한 인물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가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연암은 십 여 년 준비한 일생일대의 대사인 과거시험에서 나무와 바위를 답지에 그려놓고 그냥 나와 버린다. 시쳇말로 또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연암과는 조금 다르지만, 백범 역시 요지경이 된 과거시험장을 개탄하면서 결국 아버지가 시험을 본 것으로 적고 나온다. 이러한 행동 일면에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기득권에 편승하기보다 그것에 과감히 도전하고 맞서 싸운 깨인 의식과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소 부조리를 혁파하고자 한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 날 이만큼의 진보가 이루어 진 게 아닐까 싶다.
백범의 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이른바 ‘치하포 사건’이다. 得樹攀枝未足奇(득수반지미족기), 懸崖撒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서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대장부다. 라는 뜻이다. 이 詩는 冶父道川선사의 禪詩이고 그의 스승인 후조 고능선에게 배운 대목다. 김구선생이 왜놈 스치다를 발견하고 거사를 결심할 때 결정적으로 힘을 준 구절이다.
연암 박지원이 과거시험 답안지에 나무와 바위를 그려 놓고 나오는 배짱, 백범이 ‘懸崖撒手丈夫兒 현애살수장부아’를 행하는 결단력 그리고 ‘신의 조각상에 소변’을 볼 수 있는 파격. 바로 이것이 오늘날 나에게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들이다. 누가 나를 욕하든 말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괴테가 60년에 걸쳐 썼다는 ‘파우스트’라는 문학 작품이 있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을 꼽는다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신이 되고자 하지만 결코 신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절망의 나락에 빠진 파우스트가 그런 존재다. ‘절대 경지’에 오르려 하면서도 ‘현세의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그것이 바로 이중성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인간의 이중성’이 잘 나타나지만, ‘대한민국이란 나라에도 이중성’이 온존한다. 그것은 통일에 관한 것인데,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 내부의 자기 분열적 적대감과 상대에 대한 자폐적 부정은 이중성을 넘어 다중적인 장애를 안고 있는 셈이다.
서울과 평양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대동강을 거닐다가 저녁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터이다. 서울, 평양은 물론 백두산과 한라산을 자유롭게 오가며 한밤에 승용차를 몰아 ‘자유로’를 따라 개성 그리고 평양, 신의주까지 신나게 달리는 것도 생각해보았을 게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은 ‘적개심 앞에 무력’해지고 이데올로기에 속박 당하고 만다.
오늘로서 6·15 공동선언 11주년을 맞았다. 6·15 공동선언은 분단 역사상 ‘남북의 정상이 최초로 만나 민족의 평화통일’을 대내외에 천명한 중차대한 사건이다. 특히 체제와 이념이 상이한 남과 북의 통일방안에 대해 기본적인 합의를 이룬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논하기를 체육만 잘하고 영혼의 양식이 없는 사람을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먹고 자고 열심히 운동하여 몸은 튼튼하나 올바른 의식이 없는 즉 ‘철학의 빈곤’을 우려한다. 6·15 공동선언의 역사적 의의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의 한편’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이념 투쟁에 골몰한 나머지 ‘철학의 빈곤’을 초래하였고, 결국 ‘지혜와 전략’은 없고 실속 없이 덩치만 키워버린 꼴이다.
이탈리아의 정치가 마키아벨리를 잘 알 것이다. 대체로 그에 대한 평가는 목적만 정당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국내는 물론 외세와 열강에 의하여 사분오열되고 갈등과 질곡에 빠진 조국을 구할 방법을 찾고자 목숨을 걸었다. 그에 대한 방도를 적은 책이 ‘군주론’이다. 또한 조국 이탈리아의 분열을 확대 재생산시키는 메카니즘이 귀족들의 사리사욕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는 데에는 군주의 지혜와 능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조국 이탈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현실주의 정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시 통일을 추구하되 한반도 주변 상황과 한반도가 처한 냉엄한 국제 사회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결국 신이 구원했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발생지이자 중심지였고, 그 가운데는 마키아벨리가 있었다. 세월의 격간이 있지만 궁극에는 그러한 기반을 토대로 마침내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열강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인가? 아니면 그 어떠한 것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인가?
잠시 중세기를 살펴보자. 오로지 신과 교황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을 찾아 해방을 맞았듯이 탈냉전시대에 걸맞은 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이제 벗어나자. 6・15 공동선언 11주년을 맞아 남북문제와 통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다잡자. 6・15 공동선언이 단순히 김대중・김정일 두 사람의 합의가 아닌 멀리는 ‘7・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등의 연장이고, 특히 그 정신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모든 정권의 통일정책을 계승·발전시킨 6・15 공동선언은 정파적 이해와 이념적 괴리를 넘어서는 통일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대승적 차원에서 이를 수용하고 다함께 발전시켜 나가야할 통일에 있어서 ‘현실적인 과제이자 타개책’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에게도 갖은 속박과 끊임없는 분열의 종지부를 찍고 다시 한 번 해방의 춤을 멋들어지게 출 수 있으리라. 6・15 공동선언 11주년을 맞아 정파를 초월하고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으면 한다.
1945년 식민지배가 종료되었다. 하지만 곧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6.25 라는 동족상잔을 치렀다. 1990년 드디어 냉전체제가 막을 내렸으나 남과 북은 여전히 대립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 남북은 물론이고 ‘남남갈등’ 역시 잣아 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언 65년 이라는 세월이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점점 평화와 멀어지는 느낌이다.
분단구조가 낳은 병폐가 여럿 있다. 그중에 아주 고약한 것이 바로 ‘이분법적 사고’ 혹은 ‘흑백논리’이다. 즉 나와 다른 것은 모두 악이고 쉽게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사고는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나아가 집단과 집단 그리고 사회 전체에 까지 팽배해 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 나와 다른 지역의 사람은 나쁘고 악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 심지어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것도 배척하는 지경이다.
그 다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판단하고 그 이면은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등포역의 노숙자를 혐오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아픔과 사연이 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또 절도범에 대해서 그를 증오하기 쉽지 그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는 헤아리지 않는다. 아니 헤아리지 못한다. 오로지 보는 것이라고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천착한다.
마지막으로는 ‘자신과 다른 것’ 혹은 ‘자신과의 차이’에 대한 배려가 없다. 오로지 자기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맞추려 한다. 자신의 방식과 가치관에 맞지 않으면 상대를 배척하고 심한 경우에는 악으로까지 몰아 부친다. 내가 볼 땐 이러한 것도 일종의 정신적 편집증이다.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어떻게 자기와 같은 생각, 자기와 같은 가치관 그리고 자기와 같은 생활방식을 남에게 요구할 수 있는 지 안타까울 뿐이다.
분단구조가 빚어 낸 이 고약한 이분법적 사고, 나아가 현상만 보는 근시안적 태도, ‘다름’에 대한 이해 부족, 이 모든 사회편 집증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각박해지고 참담해질 것이다. 그래서 흑백논리와 경도된 사고를 균형 있게, 현상만 보는 근시안을 그 이면까지 볼 수 있는 여유, 나와 다름에 대해서 한데 어우러지는 마음, 그러한 생각과 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회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첩경이다.
ps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상대의 생각도 옳다고 생각하자.
ppss 정치적 성향도 모두가 다르고 통일을 보는 시각도 모두가 다르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가설로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각자가 다르다는 것이 어쩌면 아름다운 것이고 자연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체제이다. 재조지은이란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뜻이고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외교적 인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과 가치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횡행한 것을 재조지은체제라고 한다. 물론 왜란 전에도 조・명 관계는 조공을 올리고 책봉을 받는 사대관계였다.
전쟁을 도와 준 은혜는 고마운 일이 분명하나 전쟁 이후는 물론 심지어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지나친 보은과 사대를 강조한 것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국제관계는 개인적 관계와는 다르고 또 명분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 시 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의 위상과 양국 간 지정학적 관계, 그리고 조선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임진왜란 후 재조지은이 어느 정도로 위세를 떨쳤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명나라 황제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를 충북 괴산에 세우고 이여송, 양호, 형개 등의 장수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미 명나라는 멸망(1644)하고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이러한 재조지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송시열(1607-1689)이다. 언급했듯이 은혜에 보답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은 좋으나 청나라라는 새로운 패권국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전혀 없고 오로지 감정만 앞세우는 것은 국제정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미 명나라를 접수한 새로운 패권국인 청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조선의 태도는 한마디로 가당찮은 일이었다. 정묘 ・ 병자호란은 결국 이러한 연유에서 발생하였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금, 청과 같은 오랑캐 나라와는 상종 조차하지 않고 북벌을 외치던 인조는 지금의 잠실 석촌 호숫가에서 동지섣달 얼어붙은 땅에 코가 닿도록 청의 홍태지에게 삼배를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 혹은 실리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인조가 북벌을 주장한 것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국제정치를 보는 안목이 부족했고 그 이면에는 교조적 성리학과 당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북벌도 중요했지만 오히려 우리나라를 친 일본 즉 왜벌을 주장했어야 했다.
재조지은의 사상적 배경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일점일획도 감히 고칠 수 없는 지고지선의 가치였을 뿐 아니라 생사가 오가는 무서운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인조 이후 줄기차게 북벌을 외치고 순조 대代 까지 재조지은을 고수한 결과, 불행히도 또 다시 일본에게 먹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식민지배가 끝나고 광복을 맞았으나 다시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이번에는 우리 끼리 총칼을 들고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아직도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비극인가. 더 큰 문제는 ‘제2의 재조지은’ 이 이 땅에 자리 잡게 된다는 점이다. ‘제2의 재조지은’ 을 아는가?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또 인간이란 ‘이성’과 ‘합리’를 주창하기 이전에는 오직 ‘신의 피조물이었고, 자연의 일부’였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자연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무한히 가공되고 지배되며 대상화되었다. 이른바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기어이 자연위에 군림하고 말았다. 근대 이후 오로지 과학 기술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과 오만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수백 년 동안 근대의 자연 지배 패러다임이 한창 일 때, 마침내 세계를 진동케 하고 공포로 몰아넣은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자연의 분노 이든 신의 공격이든, 참사의 원인에 골똘하기보다 대자연 앞에 겸허하고 반성하고 공존하라는 인간을 향한 일종의 옐로우 카드임을 알아야 한다. 차제에 일본 뿐 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는 물론 전쟁과 민중 봉기도 예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운의 도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가본 사람이라면 핵폭탄의 위력과 참혹함을 잘 알 것이다. 당시 피폭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는데 그 참상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한편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1945년 8월과, 2011년 3월의 일본 상황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역은 핵폭탄 투하로 도시 전체가 궤멸되었다. 추풍낙엽처럼 집과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앙상한 건물 뼈대만이 황량하게 남았다.
지금의 도호쿠 지진 쓰나미는 후쿠시마와 센다이 주변 도시를 삽시간에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노아의 홍수를 뺨치는 거대한 수마는 도시 전체를 아예 휩쓸어 버렸다. 두 개의 사건이 교차하면서 허망함과 비애와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일본은 세계 최초의 피폭국가이기에 누구보다도 핵의 파괴력과 위험성을 잘 안다. 현재 일본이 가동 중인 핵발전소는 대략 100기로 추정한다. 그중에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이번 지진으로 폭발사고가 났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진대地震帶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외부의 핵 공격도 문제이지만, 자체 핵사고로도 큰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걸 이번 사태가 잘 대변해 준다. G1이니 G2니 하는 국가도 이 같은 재앙 앞에는 속수무책이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하자. 현재 우리나라는 월성, 고리, 영광, 울진에 약 20기 내외의 핵발전소가 있다. 아직까지 큰 사고는 없지만 알게 모르게 작은 사고는 여러 번 있었다. 내 고향이 울산인데 동쪽으로는 월성, 남쪽으로는 고리 핵발전소가 있다.
또 울산에는 각종 화학 공장이 많아 자연재해로 인한 사고나, 다른 이유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과학이 발달한 만큼 더욱 위험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지진이라는 재앙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핵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지도 알아야 한다. 일단 핵분열 생성물질은 방사능을 내게 되는데, 이것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의 재’라고도 부른다. 만약 피폭을 당하면,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사망하거나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들이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다. 결국 핵발전소는 국가의 에너지 공급을 위한 커다란 도박이고 모험 인 셈이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가공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하고 발칙한 상상, 그 상상이 만든 거대한 아방궁은 일순간에 초토화 된다는 걸 이번 기회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과학 기술로써 생크림 맛 보다 더 짜릿한 쾌락을 맛볼 수 있다지만, 그 쾌락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전체가 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과학 기술만을 맹신하고 자연에 패역을 부릴게 아니라 자연과의 화해를 통해 인간 · 자연 · 과학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체제의 상이함 등 그들의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우리 사회에서 적자로 살아가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다. 이들의 정착을 위하여 정부와 민간 등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들만이 가진 장점을 적극 활용하여 통일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면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그들이 가진 장점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탈북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북한체제에서 한동안 살았던 사람이다. 때문에 남한과 북한 사회를 모두 살아본 경험이 있다. 한편 이것이 일정기간 정체성 혼란을 겪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록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지만, 서서히 남한 사회를 이해하면서 정착하게 된다. 따라서 미래 통일 한국으로 가는 시점에서 그들의 경험을 십분 활용하고 또 일정한 역할을 담당케 함으로써 일정 부분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교육문화원은 ‘탈북 청년 자원의 통일 활용 방안’에 대하여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연구 ・ 조사하였다. 자체 연구 조사는 본원에서 실시하는 ‘남한 직장 체험 프로그램’, ‘남북한 역사 아카데미’, ‘기독청년 미래통일 컨퍼런스’, ‘북한인권의 대안모색 워크숍’, ‘탈북자 금융경제 교육’ 등을 실시하였다. 문헌조사는, 연세대학교 통일학 석・박사과정에서 탈북자 관련 논문으로 하였다.
이러한 연구 조사를 통하여 얻은 몇 가지의 결론이 있다. 그 중에서 탈북청년 자원을 활용하여 미래 통일한국을 만드는 데 그들의 역할과 활용방안에 주목하였다. 우선 탈북청년들의 통일자원으로서의 활용 목적을 요약 한다.
첫째, 통일에 대한 혼란을 줄이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탈북자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체제에 대한 이해를 모두 하고 있으므로 이념과 체제 대립에서 초래되는 혼란을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둘째는, 통일과정 혹은 통일 이후에 남북한 주민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정서적, 심리적 갈등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정할 역할을 할 수 있다. 탈북자들은 남한과 북한 두 개의 사회를 모두 경험했으므로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적절히 해 낼 수 있다.
셋째, 통일 전인 현재의 시점에서 탈북자들과 특정 집단을 작은 ‘표본’ 혹은 하나의 ‘모델’로 설정하여 미리 통일한국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이 모델을 통하여 발생하는 문제점을 정부와 민간이 참조하고 보완한다. 마지막으로 통일한국 즉, 두 체제를 융합 발전시킬 수 있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6.15 선언에서의 제 2항이나 혹은 경제협력 등은 예외로 하고 주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약술한 draft 이다.
논어는 20편으로 다음과 같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로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 ‘학이’ 편이다. 일주일에 약 1장 정도를 익히면 일 년이면 팔일편까지 마칠 수 있겠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그거 읽어서 돈 되겠나? 읽기만해서는 돈이 안 된다. 읽고 사색해야한다. 그러고는 삶에 적용해야 한다. 충분히 돈이 되고 고품격의 삶을 살 수 있다. 아파트 평수가 넓고 자동차 배기량 큰 게 품격과 행복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독으로라도 한번 읽어보라.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읽도록 하라.
총 20편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학이 16장
위정 24장
팔일 26장
이인 26장
공야장 27장
옹야 28장
술이 37장
태백 21장
자한 30장
향당 17장
선진 25장
안연 24장
자로 30장
헌문 47장
위공령 41장
계씨 14장
양화 26장
미자 11장
자장 25장
요왈 3장
논어 ; 학이 ; 제1장
▣ 제1장(第一章)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열) 乎아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공자께서는 이렇게 강조했지만 대한민국의 대수의 사람들은 공부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초중고 청소년들을 보자. 그들이 공부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다. 세칭 대한민국의 최고의 고등학교라는 서울의 D 외고 경기도의 Y 외고 등에서 하는 공부는 주로 ‘선행학습’이다. 즉 2학년에 할 것을 1학년에 하는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출문제를 풀고 모의고사를 잘 본 후에 자신의 점수로 어느 정도의 대학에 갈 수 있는지 혹은 수시가 유리한지 정시가 유리한지를 가늠한다.
그렇게 와신상담하여 대학에 가면 어떠한가? 역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게 여기겠는가? 대학 역시 기쁘게 여길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취업이이라는 게 대학 입시보다 더 어려운 관문이 되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보다 더 빡센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래서 소위 스펙을 쌓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어른, 기성세대들은 어떤가? 공부를 하는가? 혹시 기뻐하는가? 내가 볼 땐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먹고 살기에 바쁘다는게다. 일년 책 한 번권도 안 읽는 국민이 상당수라는 게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만 공부를 함으로써 그 문제에 대한 분석과 전략을 세울 수 있고 더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또 삶의 지혜를 높이게 된다. 오늘의 현실은 어른이 되면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공부는 어느 정도의 삶의 내공이 쌓였을 때 하는 게 어린 시절 보다 훨씬 이해가 빠르고 재미가 있다. 그리고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빨리 알게 된다.
물론 아주 옛날에는 공부하는 것이 쉬웠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또 노는 게 엄청 재미있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공자는 더 잘 알았을 것이다. 노는 게 재미있다. 하지만 어떻게 노는 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학(學)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모두 선(善)하나 이것을 앎에는 먼저 하고 뒤에 함이 있으니, 뒤에 깨닫는 자는 반드시 선각자(先覺者)의 하는 바를 본받아야 선(善)을 밝게 알아서 그 본초(本初)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습(習)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마치 새 새끼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열(說)은 기뻐하는 뜻이다. 이미 배우고 또 때때로 그것을 익힌다면 배운 것이 익숙해져서 중심(中心)에 희설(喜說)을 느껴 그 진전이 자연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습(習)은 중습(重習)[거듭함] 이나, 때로 다시 생각하고 연역(演繹)해서 가슴속에 무젖게 하면 기뻐지는 것이다.”
또 말씀하였다. “배우는 것은 장차 그것을 행하려고 해서이니, 때로 익힌다면 배운 것이 내 몸에 있다. 그러므로 기뻐지는 것이다.”
사씨(謝氏)가 말하였다. “시습(時習)이란 때마다 익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앉음에 시동(尸童)과 같이 함은 앉아 있을 때의 익힘이요, 섬에 제계(齊戒)함과 같이 함은 서 있을 때의 익힘이다.”
有朋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동지(同志)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내 어릴 적 만해도 이웃 마을 친척집에 가는 것이 즐겁고, 명절에 친지가 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설과 추석에 부모 형제 일가친지가 서로 만나기 힘든 세상이다.
윤씨(尹氏)가 말하였다. “학문(學問)은 자신에게 달려 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서운해 할 것이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비록 남에게 미치는 것을 즐거워하나 옳다함을 받지 못하더라도 서운함이 없어야 이것이 이른바 군자(君子)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건대, “남에게까지 미쳐서 즐거운 것은 순(順)이어서 쉽고, 알아주지 않는데도 서운해하지 않는 것은 역(逆)이어서 어렵다. 그러므로 오직 덕(德)을 이룬 군자(君子)만이 능한 것이다. 그러나 덕(德)이 이루어지는 소이(所以)는 또한 학문이 올 바라야 하고, 익히기를 익숙히 하고, 기뻐하기를 깊이 하여 그치지 않음에 말미암을 뿐이다.”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낙(樂)은 열(說)을 말미암은 뒤에야 얻어지는 것이니, 낙(樂)이 아니라면 군자(君子)라고 말할 수 없다.”
김구 백범 선생은 1876년생이다. 그의 나이 17세 되던 1892년, 황해도 해주에서 경과(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살사하는 과거) 가 있었다. 백범이 이 과거 시험을 치기로 마음먹고 준비에 들어간다. 백범과 그의 부친은 과거 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만 정선생이라는 분의 도움으로 시험 준비를 그런대로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험 당일 과거장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과거장은 원래 수험생이외는 들어 갈 수가 없는데 특히 조선후기에 문란해져 여러 사람이 들어가는 폐해가 생긴 것이다. 또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난리였다. 초시를 보려고 乞科(걸과)하는 모습은 그마나 보아 넘길 만 했으나, 대작 대필을 하는 경우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사정이 그 지경에 이르자, 백범은 걸과 즉 노인들이 시관(시험감독관) 에게 한번만 응시하게 해달라는 광경을 보고서 결국 과거 답안지에 아버지 아름을 쓰고 자기는 나중에 응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통인(일종의 사환)하는 자들이 시험답안지를 감독관에게 보이지도 않고 도적질을 해가고 남의 글을 보고서 자기의 글로 제출 하는 사람, 게다가 돈을 주고 합격하기도하고 大臣(대신)에게 빽을 써서 합격하기도 한다.
심지어 감독관의 수청 기생에게 주단을 몇 필 주고 합격하는 이도 있었다. 결국 백범은 이러한 과거 시험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다른 공부와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다.
김구선생보다 과거 시험보다 더 흥미로운 역사를 나는 보았다. 그가 바로 연암 박지원의 과거시험에 관한 일이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서 답안지에 바위와 고목만을 그리고 나온 것이 바로 연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를 보러 가서 답안지에 그림을 그리고 나온다고 생각해보라.상상초자 할 수 없는 일이고, 당장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그 후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정철조, 백동수 등 장안의 괴짜와 걸출들과 어울리며 젊은 시절을 보내는데 그들이 바로 북학파의 한 줄기이기도 하다.
연암은 연유가 있겠으나 과거시험을 스스로 포기하고 당시 양반사회와 사회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는 격식을 싫어하는 일종의 자유인으로 살면서 고관대작들을 냉소하며 풍류와 유람으로 세상을 산 것 일테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조롱이고 부조리와 악습을 혁파하려는 것이 아닐 런지 싶다.
나는 연암이 과거시험장에서 답안지에 나무와 바위를 그려 놓고 나오는 대목을 읽고 파안대소 했다, 나는 왜 그런 배짱이 왜 없는가? 통일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이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것 보다 더 힘들고 고독하다. 때로는 마치 외과 수술과 같은 고통이 만신을 짓누르는 것 같다. ‘천국보다 낯선’ 이라는 영화를 볼 때 느꼈던 지루함보다 더 지루하다. 결국 내가, 내 삶이 참으로 경박할 뿐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매미는 여름밖에 모른다고 하였다. 내가 매미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매미는 봄도, 가을도, 겨울도 모르고 오직 한 철 여름만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미는 단 한 철만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알기에 그렇게 울어 대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때로는 매미처럼 지독하게 울어야 한다. 울지 않는 매미는 없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연암 선생은 우는 것이 웃는 것이라 했다. 아기가 어미 뱃속에서 나와 우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고 양수에 열 달 동안 갇혔다가 해방되는 기쁨의 소리이니 그것은 울음이 아닌 바로 웃음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매미도 우는 게 아니라 웃는 것이고 노래하는 것일테다.
내가 외롭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그러하다.또 내가 외롭다는 것은 결국 칠정과 상통하고 서로 연결된다. (喜,怒,哀懼,愛,惡,欲) 기쁨과 슬픔이 그러하고 사랑과 미움도 그러하다. 매미가 한 여름에 웃듯이,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 웃듯이 나도 우리도 호탕하게 웃으며 걸어가리라.
대개 사람을 평가할 때, 어느 대학 출신인가를 보게 된다. 나도 그리 심한 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대학 간판을 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 와서는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에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글을 잘 쓰는 가로 바꾼 것이다.
이른바 S대학을 나와도 글 쓰는 것을 보면 시쳇말로 '개판오분전'인 사람이 상당수다. 심지어는 민망할 정도인 사람도 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대학을 졸업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글이 소설가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말은 지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글을 그 사람의 지식수준을 보여준다. 따라서 글로써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별로 무리가 아니다. 또 글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가의 척도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글을 잘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 쓰려고 노력은 한다. 글쓰기에 관한 책울 약 20권을 읽었고 일주일에 책 두 권 정도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짧지만 하루에 한편이라도 글을 쓰려고 한다. 그래야 글을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들을 평가할 때도 민사고인가, 혹은 대원외고인가로 보지 않는다. 학교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글을 먼저 본다. 토론 대회에 나온 대상 수상자들의 글을 보면 글의 내용이 장난이 아닌 경우가 많다. 언젠가 글이 이게 뭐냐고 조금 나무랐더니 그 친구 왈, “내가 작가가 될 것도 아닌데요. 뭘!”
통일교육문화원은 통일을 주제로 토론과 논술 대회를 11번이나 개최했다. 이번 대회부터는 글쓰기 능력을 예년보다 높게 평가하기로 했다. 글쓰기가 제대로 된 후에 토론을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간혹 토론만 잘하면 되지 라는 생각과, 토론을 말 잘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도 이참에 환기시키고자 한다. 통일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논리적인 글을 쓴 후에 상호 토론을 하는 게 순리이다.
통일교육문화원은 청소년들에게 글쓰기 능력을 우선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토론인데 토론 역시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과 상대를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언급했듯이 작가만이 글을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회에 진출하여 어떤 직업을 갖든 글쓰기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글을 읽고 글쓰기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우리가 왜 글을 잘 써야 하는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하버드대학의 교육목표는 세계적인 리더를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국의 대통령부터 정치, 외교, 행정, 비즈니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하버드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하버드대학이 하버드 출신을 배출하면서 가장 신경쓰는 분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글쓰기’입니다. 작가양성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졸업생을 모두 언론사 기자를 만들 것도 아니면서, 왜 글쓰기과목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도 안 시켜주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이 명문대학이 목표로 하는 세계적인 리더의 양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이 글쓰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렇게 철저히 글쓰기교육을 시키는 학교이기 때문에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 대학 교육대학원의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 교수는 『하버드 수재 1,600명의 공부법』에서
"하버드생들이 4년 동안 가장 신경쓰는 분야가 바로 글쓰기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은 대학생활은 물론 직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다."라고 강조합니다.
하버드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글쓰기 프로그램을 갖고 있습니다. 1872년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익스포스(Expos)'라고 부르는데, 바로 논증적 글쓰기 프로그램(Expository Writing Program)입니다. 그들이 '하버드의 전통' 이라고 자랑하는 이 프로그램은 하버드에 입학하면 누구나 한 학기를 수강해야 하는 과목입니다.
프로그램이 녹록치 않습니다. 굉장히 '빡셉'니다. 익스포스10, 익스포스20, 익스포스52 등 세 단계가 있는데, 여러 편의 논문을 써야 하는 것은 기본이지요. 논증전개 방법, 근거자료를 종합하고 인용하는 방법, 표절을 피하는 방법, 문장이나 단락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방법, 문체론 등을 배웁니다. 문장유형, 메타포, 리듬, 아이러니, 역동성 등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베이컨, 에머슨, 디킨슨, 로렌스, 오웰 등의 작품 문체에 대해 토론도 합니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이 프로그램의 교수진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입니다. 모두 40여 명인데, 이들 가운데 전공이 영국 문학이거나 미국 문학인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철학, 미국 역사, 유럽 역사, 환경, 문화인류학, 러시아 문학, 사회학, 대중문화, 시각문화, 공연, 음악, 생리학 등 전공도 관심분야도 가지가지입니다. 켈트문학을 전공하고 가수와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글쓰기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백그라운드를 가진 교수진이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글쓰기 테크닉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전개과정을 가르친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영문학과 교수가 어떻게 천체과학에 대한 글쓰기를 지도하겠습니까? 글쓰기 자체를 이미 문학에서 완전히 떼어내 오히려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으로 옮겨놓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글쓰기 가이드책자도 종류가 가지가지입니다. 심리학 관련 글쓰기, 종교학 관련 글쓰기, 동아시아 연구에 대한 글쓰기, 생명공학에 대한 글쓰기, 철학에 관한 글쓰기, 음악에 대한 글쓰기 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공학에 대한 글쓰기 가이드를 보면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글쓰기는 다른 과학자들은 물론 과학에 대한 아이디어와 과학적 발견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과학을 연구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실험노트를 작성하고, 연구제안서를 쓰고, 연구논문 형태로 스토리를 얘기하는 것 모두가 과학적 사고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래서 이 가이드책자에는 실험노트, 연구제안서, 연구논문, 과학논문에 대한 비판과 대중을 위한 글쓰기 등에 대한 상세한 방법론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익스포스의 이 '생명공학 글쓰기강좌' 가 두 가지 접근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는 글쓰기를 통해 과학적 사고를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 또 하나는 과학을 통해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좌는 자신의 과학전공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익스포스에 들고 와서 글쓰기를 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한마디로 글쓰기 커리큘럼과 과학 커리큘럼이 통합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야 훌륭한 작가이자 훌륭한 과학자를 배출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하버드는 익스포스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글쓰기와 사고력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훌륭한 사고력은 훌륭한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하버드대학뿐만 아닙니다. 경제계의 리더를 육성하는 비즈니스 스쿨도 마찬가지입니다. 와튼스쿨은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교육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학생이 '글쓰기세미나'를 수강해야 합니다. 비판적인 사고와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와튼스쿨은 비즈니스 교육을 예술, 과학 교육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또 인디애나대학 켈리스쿨은, 글쓰기만 따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업에서 글쓰기, 말하기, 듣기, 팀워크를 통합시킨다고 합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는 이 대학의 스밀(Smeal) 비즈니스스쿨의 글쓰기 모듈을 전학생이 수강해야 합니다. 리치먼드대학의 한 회계학 교수는 자신의 중급회계학 수업에서 비즈니스와 관련없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에 대해 페이퍼를 쓰라는 숙제를 낸다고 합니다.
미국의 기업들도 글쓰기능력을 우선순위에 두고 인재를 뽑고 있습니다. 글쓰기 능력은 비즈니스 전공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베스트뱅크, 컨설팅회사뿐 아니라 테크놀로지회사까지 리쿠르팅 기준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온 나라가 글쓰기에 목숨 건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습니다. 스스로 리더국가로 자부하는 미국인 만큼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입-대학교-입사-직장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큰 굽이마다 글쓰기능력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교육됩니다. 대입전형에서는 학업성적 외에 SAT, 과외활동 및 수상경력, 추천서, 면접 그리고 에세이 등을 요구합니다. 이 가운데 에세이는 단독항목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SAT 내 과목으로도 지정돼 있습니다. 글쓰기로 대학가고 글쓰기로 취직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닙니다.
2007년 '미국대학설명회'를 위해 한국에 온 하버드대 낸시 소머스 교수는 국내 한 주간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습니다. 소머스박사는 익스포스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버드는 사회에서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익스포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단순한 학습효과를 뛰어넘어, 능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지난 사회인으로서의 덕목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다. 생각을 탄생시키는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학문적인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분야에 꼭 필요한 과제다."
정리하면, 공부를 잘 시키기 위해서 뿐 아니라 능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그렇게 모질게 글쓰기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재양성이나 리더교육을 위해 왜 글쓰기가 이렇게 중요한 걸까요? 보다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보다 합리적인 사고의 정리를 위해 글쓰기보다 더 유효한 수단은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고, 글로써 보다 명료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보다 선명한 '소통'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위로 납작 짓눌리지 않고 세대구분 없이 원활하게 '소통'하고, 자기 삶의 키를 스스로 쥐고 살아가며, 나아가 어떤 분야에서든 리더가 되려면 이렇듯 글쓰기능력이 필수적입니다.
목사를 흔히 영적 지도자라고 한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도자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 지도자는 아니다. 교회 뿐 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든지 마찬가지다. 이것은 부적격자가 그 만큼 많다는 것이다. ‘목사 지도자론’ 은 일단 차치하고 여기에서는 논할 게 따로 있는데, 맨 마지막 부분에서 논하고자 한다.
그제 L 목사님을 만났다. 오늘날 목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목사의 역할’을 짧은 시간에 구체적으로 말하기엔 무리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 진보했고,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만난 L 목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 역할이 오늘의 현실에 더 적합하다고 했다.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일리가 있는 얘기다.
또 한 가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목사가 성경 외에 인문 사회 과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야 하는가이다. 개인적으로 목사는 인문 사회 과학에 밝아야 하고, 그것은 결국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 성경만 읽고 기도만하는 시대는 더욱 아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는데 이것도 기실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는 게 아닌가. 성령 충만을 기적이 나타나고 영안이 열려 신과 직통으로 대화하는 것으로만 보면 곤란하다.
이쯤에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선의 최고 성군 세종은 신하보다 자신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기에 대신들 역시 백성보다 자신들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본론이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게 첫째 덕목이다.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수능을 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 보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오늘날의 위기는 다름이 아닌 바로 지도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천박한 의식에 사로잡히고 윤리마저 무너져버린 자본주의에 매몰된 것이다.
국회의원이니 장차관이니, 교수 박사 등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 적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아예 공부하고는 담을 쌓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해도 그 자리가 보전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른바 자기의 일에 대해 내공이 있을 리 만무하고 사회는 더욱 경박해지는 것이다. 사회 지도자가 이 모양이니 일반 국민들을 오죽하겠는가.
10대 고등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게 아니라, 지도자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비로소 나라가 제대로 서게 된다. 부적격자를 자연스럽게 도태시키고 실력 있는 적격자가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종이 왕이 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이 얼마나 세상을 괴롭게 하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항상 공부하고 실력을 키우고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도자이고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자이다. 오늘 날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고 이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
원평 김기환
참고로 여기에 종교와 분야를 초월하여 목사가 주역을 강의한 책이 있어 이참에 소개하고자 한다.
"주역실의"의 저자 이치문목사의 주역강의
▲ 저자 이치문 목사
주역(周易)은 무슨 신비한 책이 아니다. 먼 옛날 성현(聖賢)들이 자연현상을 보고 세상과 삶의 이치를 생각하여 정리해 낸 지혜서이다. 주역이 부호와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혼란을 야기(惹起)하고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이 건이이지곤이간능(乾以易知坤以簡能) 즉, “하늘의 이치는 간이(簡易)하여 알기 쉽고, 땅의 이치는 간단(簡單)하여 좇기 쉽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수 있듯이 주역은 매우 알기 쉬운 경전이다.
임금에게는 밝은 정치, 정의로운 사회, 백성에게는 반듯한 삶을 위한 지혜서요 철학책이다. 주역은 임금이나 백성들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몽학(蒙學) 선생이다. 누구나 주역이 말하고 있는 바를 실천한다면 변화를 일으켜 복을 얻는다는 것이 주역(周易)의 역(易)이 가지고 있는 뜻이며, 의도하는 목적이다. 주역은 세상과 삶의 이치로만 보면 가히 성경과 견줄만한 지혜서이다.
그러면 왜 공자(孔子) 같은 성인(聖人)이 단박에 깨치지 못하고 위편삼절(韋編三絶) 즉, 책을 꿰어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으며, 그러고도 이해를 하지 못하여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생명을 더 연장해주어 내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주역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게 된다면 나의 인생에 큰 허물이 없으리라.(子曰加我數年五十以學易可以無大過矣, 論語述而)”고 고백하였으며, 수천 명의 대가들이 주역을 주석(註釋)했는데, 그 주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역림삼천(易林三千)이라는 말이 생겨났는가? 더욱이 동양 제일의 고전이요, 지혜(智慧)의 보고(寶庫)인 주역이 어찌하여 몽상(夢想)이 난무하는 점서(占書)가 되었는가? 그 이유는,
첫째, 그동안 괘 이름을 잘못 읽고 있었다. 부호로 이루어진 64괘의 이름은 아래의 부호로부터 위의 부호로 읽어야 한다. 맨 아래의 효를 초효(初爻)라 하고, 맨 위의 효를 상효(上爻)라 부르는 것과 같이, 아래 소성괘에서 위의 소성괘로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제7괘 지수사(地水師)는 수지사로, 제15괘 지산겸(地山謙)은 산지겸으로, 제33괘 천산돈(天山遯)은 산천돈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괘의 정확한 의미를 알수 있다. 주어가 바뀌면 그 의미는 천지차이다.
水地師 물은 땅을 정복하는 군대다. 물이 땅위를 흘러가는 것이 마치 군대가 대오를 지어 적진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연상하게 한다. 군자는 땅을 정복하는 듯이 일사분란하게 대오를 지어 흘러가는 물을 보고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즉, 단체에는 대오(隊伍) 곧, 규율이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山地謙 산은 땅보다 높지만 땅에 겸손하다. 군자는 산이 높지만 땅에 겸손한 것을 보고 배움이 있어야 한다. 즉, 겸손한 자세로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山天遯 산이 하늘아래 숨는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과 그 키를 경쟁할 수 없다. 하늘과 다투지 않고 물러나 숨는다. 군자는 이를 보고 나가고 물러감을 배워야 한다. 즉, 강한 자와 다투지 말아야 한다.
둘째, 자연현상의 조화를 뜻하는 괘를 이해하지 못했다. 64개로 나눈 자연현상 각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말하고자 하는 핵심주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제10괘 택천리(澤天履)는 “비구름이 하늘을 밟고 서 있다. 즉, 비구름에 물이 가득 차 있어(풍부하여, 이미 충분히 부자다), 곧 비가 내릴 것이다(베풀다. 남을 돕다)”로 해석해야 한다. 이에서 리(履)괘의 핵심주제는 “가진 자는 베풀어라”이다. 그러므로 卦辭 履虎尾不咥人亨은 “호랑이도 베풀면 은혜를 갚는다”로 새겨야 한다.
제29괘 감위수(坎爲水)는 아래도 물 위도 물, 물속에 잠겨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물은 재물 곧, 돈을 뜻하므로 감(坎)괘의 핵심주제는 “돈 돈 하면서 돈 속에 파묻혀 살지 말라” 즉,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이다. 이에서 初六 習坎入于坎窞凶은 “돈을 너무 헤프게 써 마지막 남은 재산(坎窞)까지 다 탕진하는구나. 흉하도다.”로 해석해야 한다. 제56괘 산화려(山火旅)는 “산이 불을 여행시켜준다” 즉 “산의 나무를 땔감으로 이용해 산불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여행 한다”라는 뜻에서 려(旅)괘의 핵심주제는 “남의 희생 위에 내 이익을 취하지 말라”이다.
제59괘 수풍환(水風渙)은 물이 바람을 이용해 흩어지는 것과 같이 무엇인가를 지렛대로 이용하라는 괘다. 이에서 九二 환분기궤회망(渙奔其机悔亡)은 “도마를 부지런히 물로 씻으면 후회가 없으리라”로 해석해야 한다. 즉, 고기를 잘라 파는 도마를 깨끗이 하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업환경을 청결히 하여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렛대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3,000여 년 전에도 클린 사업장 개념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渙 물 출렁출렁할 환, 물 흘러 흩어질 환, 机는 도마를 뜻한다. 机上肉 도마위의 고기, 机上肉不畏刀 도마위의 고기가 칼을 두려워하랴! 이미 죽은 목숨인데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
주역실의 590쪽 양장 36,000
원앤드원북스 (T 017-701-7327) 프리존뉴스 백종원 기자 (jwbaek8390@empal.com)
허균은 자신이 사는 집의 이름을 사우재(四友齋)라고 하였다. 그것은 벗과 자신을 합하면 모두 넷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벗이란 허균이 살아생전에 이미 사라진 옛 선비들이다.
첫째는 진나라 처사 도연명이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그는 한가롭고 고요하며 작은 일에 대범하여 항상 마음이 편안했으니,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편히 여기고 천명을 즐기다가 죽었다. 그의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히 높아 잡을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연명을 깊이 흠모만 할 뿐, 그 경지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은 당나라 한림 이태백인데 그를 좋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뛰어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 여기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귀인들을 개미 보듯 하며 스스로 자연 속에서 방랑했다" 그런 그가 부러워 따라 배우려고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송나라 학사 소동파이다. 소동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이나 천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더불어 즐기니, 유하 혜가 자기의 덕을 감추고 세속을 좇는 풍모와 같은 데가 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으로 벗을 삼고 굳이 속인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여겼다.
나는 허균의 경지에는 티끌만치도 따라 갈 수 없어 다음과 같은 벗을 두었다. 첫째는 동서양의 고전을 벗으로 하였다. 고전의 매력을 사람으로 치면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의 윙크보다 진하기 때문이고 우리나라의 경광 중에는 보름달이 뜬 해운대 바다보다 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글을 쓰는 게 나에는 큰 벗이다. 글을 쓰는 것은 말과 같이 날아가지도 않고 그대로 남게 될 뿐 아니라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수 있어 어떤 벗과의 친함보다 비할 길이 없다.
셋째는 내가 연주하는 기타Guitar 다. 기타로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때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의 심안이 평온함은 물론 온 사물이 다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축구)공이다. 공이 하나있으면 땀을 흘릴 수 있어 운동으로 적당하다. 그리고 공은 항상 둥글어 모나지 않아 어디로든지 잘 굴러간다. 이 네 가지가 나의 벗이다.
그런데 아직 내 집 이름을 짓지 못했다. 고향 이름을 따서 심포서원이라 했는데 서원이라는 게 너무 흔해 온전히 정하지는 않았다. 또 인터넷 블로그에 지을까 시골 농가를 하나 구입할까 이것도 생각 중이다.
내가 이들과 벗하는 이유는 통일문제와 동북아 국제관계를 공부하면서 약간의 문약에 빠진 것 때문이고 학문을 학문답게 하지 못했기에 이제는 고전을 탐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 박사라는 것이 해외에서나 국내에서나 학문적인 내공이 다소 부족한 것을 서로가 잘 아는 바이니 이것은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공부하지 못한 것이 그 연유라 하겠다. 내가 요즘 고전 읽기에 몰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길은 하나다. 전남 해남의 마을 길이나, 경남 양산의 마을 길이나 사실 길은 모두 하나다. 서울의 복잡한 길도 따지고 보면 모두 하나다. 골목길도 넓다란 종로 길도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제주도가 비록 섬이지만, 뱃길과 비행기의 항로가 따로 있듯이 길은 육지나 바다나 하늘이나 매 하나다.
길이 하나라는 걸 강조하려는 것 보다 요즘 내가 출근하는 코스가 바꿨다. 아침 출근길에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 있는데, 바로 조광조 선생의 묘가 보이는 도로이다. 굳지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래서 아침에 조광조 선생의 묘비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지나간다.
조광조 선생은 똑똑하고 패기있는 야심찬 개혁가였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훈구파라는 세력이 있었다. 결국 전라도 화순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았다. 세상을 개혁한다는 것은 목숨을 따로 얻거나( 권력을 잡은 것)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할까. 조광조의 묘비를 지날 때면 왠지 숙연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있게 살자는 거다. 어쩌면 길이 하나라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교사가 되려고 난리다. 공무원이 되어서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거나 교육자로서 일생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사람은 솔직히 거의 없다. 대부분 안정된 직장, 즉 평생 잘리지 않고 매달 정해진 날에 일정한 금액이 통장으로 자동이체되는 걸 바라는 거다.
그런데 반드시 안정된 게 좋은 건 아니다. 내 주변에는 공무원 교사가 좀 심하게 말해서 수두룩하다. 그 사람들을 보변 그냥 월급쟁이라는 생각 외는 특별히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 직업에 20대 30대들이 떼거지로 몰리는 것은 그다지 유익하지가 않다. 나는 오히려 막연히 안정되기 보다는 조금은 위험하게 살아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남자들에게는. 딱 한번 뿐인 인생, 자신만의 색깔있는 삶을 살아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희 회장은 한번보자. 그가 진정 행복한가? 그래 물론 행복할 수도 있다. 한남동 최고로 비싼 집에서 바이마흐를 타고 다니고 가는 곳 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한편으로 보면 우리보다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희 회장의 형님이 교통사고도 죽었다. 자신도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지금도 건강이 좋지 못하다. 몇해 전에는 폐암 수술까지 받았다. 크고 작은 소송으로 검찰로 법원으로 불러 다녔다. 막내 딸은 미국에서 자살했다. 큰 아들은 얼마 전에 이혼했다. 이런 것 만보면 이회장의 삶도 돈은 많지만 그다지 행복해보지이는 않는다.
누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이구 그랬건 말건 나도 그렇게 많은 돈 한번 가져보자고. 맞다. 맞는 말이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행복이란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 있지 않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돈과 권력때문에 더 불행해지는 걸 왕왕 보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잘 하는 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라는거다. 부모가 원하는 일말고. 나는 통일교육문화원 소장이라는 직업에 좀 더 자부심을 갖기로 했다. 장차관, 국회의원, 판검사, 교수, 목사를 냉소하며 지까짓 게 뭔데 하며 도도하게 산다. 자기들이 꼬와도 할 수 없다. 피차 일반이니까.
틈만나면 부동산 투기나 하고, 권력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별로 존경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고 세금 더 물지도 않는다. 그리고 왜 꼭 직업이 삼성, 현대, SK 등에 다녀야 하는가. 왜 공무원이나 교사 정도는 되야 제대로 된 직업이라고 하는가. 이제는 그런 사고에서 벗어 나야 할 때다.
다음 주에 이른바 법조 3인방이라고 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들과 모임이 있다. 게중에는 세무사, 관세사, 법무사도 있고 기업히는 사람들도 있고 나와 같이 통일전문가들도 있다. 그런데 요즘 특히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일일이 사정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한번 말하건대 자기가 소질이 있고 잘 할 수 있는 직업, 그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바로 그런 직업을 찾아야 한다.
안정되었다는 게 최선의 직업이 아니다. 고시를 통과했다고 최고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세상에서 제일이 아니다. 돈은 자기가 먹고 살고 남에게 밥 한번 살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남을 위해 헌신해라.
그런데 그럴게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곤란하다. 책속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 도로가 아닌 인생의 길이 있다. 그길만 알면 인생을 즐겁게 달릴 수 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내가 정해 주는 책을 반드시 읽고 나와 토론하기 바란다. 딱 열권이다.
1. 국화와 칼
2. 정의란 무엇인가?
3. 남한산성
4. 칼의 노래
5. 자본론
6. 노자 장자
7. 국가론
8. 안중근평전
9. 백범일지
10. 어린왕자
원래는 최소한 20권은 읽어야, 아하~ 하고 책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없고 그넘의 학원 혹은 과외를 해야 하기에 일차로 10권 만 읽기 바란다. 단. 이 책을 다 읽고 일정량의 글쓰기 과제를 이행하면 '통일교육문화원 평화교육센터' 이름으로 전국 최초로 'BOOK 올레 인증서'를 발급하겠다.
나는 TV를 안 보는지라 유행어에 둔감한 편이다. 경박한 내가 더 경박해질까 봐 TV 드라마나 연예 프로그램을 거의 안 본다. 예번에 도올 김용옥이 쓴 ‘노자와 21세기’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한창기 선생의 말씀이 일리가 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오늘 왜 우리 조선의 역사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줄 아시오. 일제 식민지의 비극일 것 같소? 몰지각한 좌우 이념 논쟁일 것 같소? 당리당략만을 아는 정치 협잡꾼 때문일 것 같소? 관리의 부패 때문일 것 같소? 곡학아세 하는 학자들 때문일 것 같소?” 그의 결론은 바로 TV 라는 괴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창기 선생의 말씀이 다 맞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만큼 텔레비전의 폐해가 크다는 것일테다. 요즘 장안에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가 연일 상종가를 치는데 나는 보질 않는다. 한창기 선생과 같은 생각은 아니지만, 이유는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TV를 잘 안보지만 ‘차도남 차도녀’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차도남 차도녀가 아무나 함부로 되는 게 아니다. 거기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건 짜가다.
우선 차도남 차도녀의 반열에 오르려면 일주일에 책을 두 권 정도는 읽어야 한다. 잠깐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영향을 받았고 무교회주의자인 김교신 선생의 평전을 보면, 지구상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은 그라스톤 옹이라는 사람인데 평생 동안 약 1만권을 읽었다고 한다. 60년을 매일같이 읽어서 1년에 166권을 독파해만 약 1만권이 이르게 된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량은 교육열에 반비례한다. 교육열과 교육 수준에 비하면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러니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가 많을 뿐이다. 다시 차도녀 차도남 얘기로 돌아가자. 차갑다는 것은 냉철하다는 것이기도 한데 냉철하다는 것은 지성에서 비롯하여야 한다. 知性에 근거하지 않는 사회, 지성이 죽은 사회는 경박하고 경박하다 못해 천박하다. 그런 사회는 사이비 지식이나 사이비 지식인들로 득세하고 어질고 선한 민중은 그들에 의해 쉽게 세뇌된다. 그래서 권력자는 민중에게 횡포와 광기를 부린다.
한국 대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 1위인 한비야는 대학 시절부터 1년에 책 100권 읽기를 했다고 한다. 시간이 없다는 것도 핑계이고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즘 그가 벌이고 있는 운동이 일 년에 책 100권 읽기다.
도마 안중근 의사의 얘기도 짧게 해보자. 그가 어느 날 프랑스 신부에게 학교를 짓자고 제의하자 신부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이 글을 깨우쳐 소위 지식인이 되면 교회에 안 나올 것이므로 협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말에 안중근은 분개하여 프랑스어 공부를 바로 그만두고 스스로 학교를 스스로 짓는데 그 학교가 바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다. 하루도 책일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말한데서도 안 의사의 배움과 교육에 대한 열의를 잘 알 수 있다. 이쯤이면 왜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 것이다.
둘째는 영화를 한 달에 한 편 정도 봐야 한다. 이건희 회장은 대학 시절에 1000편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사업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과 인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어려운 이론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영화 한편이 훨씬 더 유익했던 적이 여러 번이다. 북한을 공부할 때는 더 그러했다. 또 영화는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데 로마의 휴일, 닥터지바고, 러브스토리, 연인들, 졸업, 서머타임킬러 등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장면(음악과 함께)들은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셋째는 시를 한두 편 정도는 읊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모두가 시인과 같은 감성을 가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내면을 순화하고 상대에게도 심안을 평안하게 한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또 어디 있을까. 게다가 아름다운 노래를 한 곡조 더 할 수 있으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음풍농월이 따로 없다.
지난해 깐느 영화제 출품작인 이창동 감독의 ‘시’란 영화도 주인공이 시를 공부하면서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을 그린 영화이다. 생각건대 시가 인간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요즘은 정말 ‘죽인 시인의 사회’가 된 것 같다. 아름다운 영혼으로 가득한 사회는 결코 비천하지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운동은 몸을 튼튼히 하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렌쯔는 인간은 동종의 동물에게 '공격본능'이 있다고 하였다. 공격본능을 최소화하거나 없애는 데 가장 용이한 것이 바로 운동이고 그것이 발전한 게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다. 그래서 한 가지 이상의 운동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남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예를 들어 김장훈과 같은 사람이다. 김장훈도 잘 나가는 연예인들처럼 논현동 최고의 빌라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는 이웃을 위해 기부한다. 돈이든, 봉사든 또 다른 형태로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존경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팁은, 열심히 사랑하라. 후회없이 미련없이 말이다. 이 정도는 돼야 진정 차도남, 차도녀라 할 수 있다. 차도남, 차도녀는 상당한 실력과 내공이 쌓인 사람들이다. 이제 싸구려나 짝퉁 차도남, 차도녀는 저리로 비켜야 할 것 같다.
한 학생이 연락이 왔다. 재수를 하겠단다. 수시에도 떨어지고 정시 모집에도 자기 점수로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그 학생은 수능 시험이 끝나고 수시 결과를 기다리며 내게 한 말은 "절대 더 이상은 입시 공부를 하지 않겠다" 고 했다. 아마도 3년간 입시에 몸서리가 난 모양이었다.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 가기 위해서 재수를 결심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말을 듣고 작년에 쓴 글을 이곳에 올린다.
본인은 물론 부모와 교사가 일제히 가슴 조이고 애간장을 태우는 날이 수능날이 아닐까. 언론보도를 보니 수능 시험이 전년도 보다 어려워져 생각보다 점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시험 점수 때문에 다들 분위기가 좋지 못하고 이래저래 걱정이 태산이다.
세계에서 한국의 부모만큼 자식 교육에 목을 매는 나라도 없다. 초중고의 교육 과정은 대학 입시에 맞춰져 있다. 대학 진학이 인생의 대사중의 대사가 되었다. 명문 대학에 진학시키고 좋은 직장을 갖게 하려는 부모의 자식 사랑을 마냥 탓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고결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자식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나아가 좋은 배필을 만나는 것은 부모에게도 행복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부모 자식 간에 공부 혹은 대학 진학 문제를 두고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 전쟁은 꽤 오랜 기간 지속된다. 자식 공부를 위해서 부모의 삶까지 바치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소위 명문 대학에 보내려면 돈이 많이 든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육비가 많이 들게끔 되어 있는 게 우리 사회의 구조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한글을 구사하는 데 막힘이 없고, 초중학교 때 영어에 도통하고, 확률·통계, 미분·적분을 식은 죽 먹듯이 하지 못하는 한, 학원과 개인 과외 어학연수 등 많은 돈을 들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렇게 많은 비용을 혼자서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말고 좋은 방법 혹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건 바로 ‘교육두레’다. 우선 영어를 한 번 보자. 주변에 외국에 유학 갔다 오고 영어깨나 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수학? 마찬가지다. 내 주변에도 서울의 유명 대학교 학생들이 초중고생 한 명 이라도 더 ‘알바’ 하려고 경쟁을 벌인다. 논술, 토론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작가 지망생이 널렸고 이미 시집이나 책을 낸 사람도 있다. 심지어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도 상당수다. 게다가 청소년 교육에 노하우를 가진 NGO 관계자들도 여럿 있다. 이들을 활용해서 교육 품앗이를 하자는 것이다.
공부하는 장소는, 자기 집에서 하든지, 각자 돌아가면서 하든지, 아니면 주민센터나 학교나 교회의 한 공간을 활용하든지, 컨테이너 혹은 가건물을 짓든지 구미에 맞게 고르면 된다.
이 정도의 준비가 되었으면 각자가 지닌 달란트로 상대의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면 된다. 예컨대 내 아이가 영어가 부족하거나 영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싶다면 이들에게 배우면 된다. 굳이 대치동이나 분당의 학원에 다니거나 고액 과외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앞서 말했듯이 영어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서 가르치면 된다. 옛날 서당과 비슷하지만 돈은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의 실력은 이른바 대치동 수준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왜 아직 안했냐고? 그건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수학, 과학, 논술 그리고 동아리활동, 체험활동, 봉사활동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해외교류 활동과 이와 유사한 부분도 교육 두레를 활용하면 된다. 해외여행은, 여행자 협동조합과 같이 운영하고 교육 두레의 기본 원리를 따르면 된다.
자! 이정도로 얘기했으면 교육비를 어떻게 절감하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니즈에 대하여 연대, 연합, 동맹을 체결함)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이들을 가르칠 달란트를 가진 선생들이 몇 명 필요한데 그것은 나와 같은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이건 인적 네트워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게 있다. 요즘 아이들 매우 똑똑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열두 살 먹은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가 거의 똑같은 (법정)수업을 받을 필요가 없다. 모두가 같은 시기에 동일한 내용을 배울 게 아니라 그보다 더 똑똑하고 짝퉁이 아닌 진정으로 창의적인 사람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기존의 교육 체제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다. 미안한 게 아니라 이건 현실이다. 교사가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 학원도 마찬가지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단지 점수를 올리는 교육에 불과하다.
언젠가 내 아이의 시험지를 본 적이 있다. 나의 70년대 시절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딱 한 가지가 변했다. '사지선다'에서 '오지선다'로 변한 것이다. 시험 유형을 살펴보니 “무엇 무엇에 알맞은 것은?, 무엇 무엇으로 적합하지 않는 것은?” 등으로 그 내용은 변한 게 거의 없다. 다만 간단한 주관식 혹은 서술식 답안쓰기가 가미된 것이 위안 이라면 위안이다.
그럼 대안학교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NO다. 지금 실시하고 있는 교육이 ‘대안교육’ 인지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문자 외 학습을 강화 한다고 대안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놀이, 체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대안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볼 땐 일반 학교와 대안학교가 별반 차이가 없다. 물론 내가 주장하는 교육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나는 교육 효과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법 긴 설說을 늘어놓았다. 현재 학교 교육의 문제를 지적했고, 사교육비 문제도 언급했다. 이제부터는 교육 내용과 방법에 대해 말해보자.
자! 우선 두 말 할 것 없이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게 하자. 지금의 학교 교육처럼 책을 읽지 않고 주로 교과서 내용만을 가르쳐 한 학기에 두 번씩 “무엇 무엇에 알맞은 것은?, 무엇 무엇에 적합하지 않는 것은?” 등으로 시험을 보고 점수를 매기는 것은 문제다. 그리고 편의상이든 정책상이든 그것을 기준으로 서열을 정하는데 이건 정말로 “아니올시다” 다.
이런 식의 교육이 대학과 사회에 까지 판을 치고 있으니 진정으로 경쟁력 있는 인재가 나오기 어렵고, 그저 그런 사람들로 수두룩하다. 이러한 풍토는 제대로 실력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서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소위 조직안에서는 충성 경쟁은 물론 심지어 자리 보존을 위해 돈이 오가기도 한다. (이런 거래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런 교육과 사회 병폐는 우리 세대로 족하고 자식세대에서 종지부를 찍게 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엄선하여 읽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책을 읽지 아니하고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어린 학생들에게 참선 수행을 시키고 면벽하여 해탈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권위있는 책이나 신간을 선별하여 책을 읽게 하거나 아니면 위대한 삶을 산 역사적 인물에 대한 책을 읽히는 것이 좋다. 일찍이 10대 시절부터 책을 통해 진리를 얻고 지혜를 터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두 번째는요? 라고 묻는다면, 바로 글쓰기다. 우선 내가 아는 사람의 글을 한 번 보자. 이 사람은 소위 서울의 명문대를 나왔다.
“일제시대 노동을 강요 당한 강제노동자들을 직접 만나보고 일제의 잔악상을 일깨운다” 이렇게 써도 말은 통한다. 이번엔 다른 사람의 글을 보자.
“모든 걸 마치고 돌아오는 걸음에 그냥 1시간 수업만 하고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학생들의 마음을 좀 더 알아주지 못한 것 같아서, 더 칭찬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움과 후회스러움으로 가볍지 못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서로 친하거나 잘 아는 사람끼리는 수다 차원에서 할 수 있다. 그게 편하다. 그러나 공식적인 말하기는 전혀 다르다. 글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글을 쓰다 보면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공식적인 글은 여러 사람이 보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작가가 아니더라도 글에 문제가 없는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이 또 있다. 학교 교사들의 글이다. 책은 워낙 바빠서 못 읽는다고 치자.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기본적인 글쓰기가 안 된다면 그야말로 문제다. 그만큼 우리 모두가 책읽기와 글쓰기를 안 한다는 반증이다. 아이들이 받아오는 가정 통신문이나 학교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에도 오류가 제법 많다. 다음 글을 읽어 보시라.
“올바른 운지법을 읽혀 컴퓨터 활용의 기초를 닦고, 타자 능력이 우수한 어린이들 발굴하여 격려하기 위한 기회를 마련하기 위하여 00 학교에서는 교내 학년별 타자왕 대회를 개최합니다.”
이 문장은 어떤가? 의사만 전달되면 OK 지 뭔 문제여? 라고 한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선생님의 글쓰기는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바로 그것이 교육이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학부모에게도 좀 더 신뢰를 줄 수가 있다.
따라서 책읽기를 한 다음 당연히 글쓰기를 해야 한다. 자기 나라 말과 글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나라 말과 글을 너무도 열심히 가르치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부모와 교사가 책을 읽지 않고 글쓰기를 하지 않는데 아직 철도 없고 그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어떻게 책을 읽고 글을 쓰겠는가? 오늘부터라도 TV 드라마와 수다 떠는 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아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자.
자 그럼 다음 순서를 무엇일까? 이 역시 너무도 당연하다.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면 자신의 의견이나 느낌을 발표하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토론해야 한다. (이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그래야 교육의 질이 높아지고 창의성이 여기에서 나올 수 있다. 창의성이란 어떤 명제나 사물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의심이나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에 기초하여 대안까지를 제시하면 더욱 좋다. 단순히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정도가 창의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 너무 길게 이야기하면 지루하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다음은 바로 아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 아이가 평소에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고 흥미를 느끼지를 부모와 교사가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효과적인 교육이다. (이창호와 이세돌을 박지성이나 이청용으로 만들면 안 된다. 그건 부모의 욕심이다)
우리는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하고 아이들에게 솔선수범하는 부모와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부모와 교사는 책을 더 열심히 읽고 글을 쓰며 (아이들만 닦달하지 말고) 친구나 이웃에게 발표하거나 대화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실과 집을 떠나서 어떤 것을 보여주고 무엇을 느끼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역사, 문화. 예술, 과학,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게끔 하자. 그래서 단순히 시험 점수가 높은 게 아니라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고 세계속에서 경쟁력 있는 참된 인재로 키우자.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입니다. 그는 은행원 생활을 하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어느 정도 우대 해 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족 친지 모두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라져 놀랐다는 것입니다. 거의 신적인 존재로 모시는 지경에 이르렀나 봅니다. 은행원 일 때는 그저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서 대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부터는 거의 신과 동급으로 대우한 것이겠지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법조인이 되었다하더라도 은행원과 법조인은 똑같은 인간입니다.
또 한 가지 더 얘기 해보겠습니다. 내 친구의 넋두리입니다. 친구의 얘기는 이른바 S대 법대 얘기입니다. 친목모임에서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다가, 이야기 끝에 “저기 저 분이” S대 법대를 나왔다고 말했더니 주변사람들이 갑자기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돌변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도 간단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내가 나는 J 목사는 사람을 소개할 때 꼭 S대를 나왔다는 것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성가대 지휘자를 소개할 때도, 외부에서 온 강사를 소개할 때도 반드시 그 사람의 학력을 이야기 하고 특히 S대를 강조합니다.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이 성가대 지휘자나 강사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나 봅니다.
학력이 어느 정도냐가 사람을 보는 척도가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얘기 모두 우리 사회에서 학교나 학력에 대한 고정관념을 잘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래도 학력과 실력이 별개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는 사회 교육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고 할 정도로 교육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통일문제, 역사문제, 인권문제 등 사회교육에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는 자신을 보면 이게 웬 팔자인가 하는 심정이 들기도 합니다.
잠시 화제를 돌려서 입시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집단학력편집증' 때문에 입시는 더 지옥이 되어 갑니다.
이렇게 입시 지옥이 되어 가지만 청소년들과 부모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이른바 SKY에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물론 이해는 가지만 언제까지 이런 전철을 되풀이해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대학 간판이 인생을 좌우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일은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경박하거나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경박하다 못해 천박하고 천박하다 못해 야만의 사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남들은 경을 칠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올 김용옥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문을 배우고 싶은 생각을 왕왕 하게 됩니다. 일단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을 배우고 성경과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오지 않겠지만 도올 선생에게 배우고 싶은 생각은 간절합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오늘날 까지 공부하면서 장안에 유명 대학을 몇 군데 다니긴 했지만 스승을 흠모하고 그의 학문을 평생 좇을 만한 사부는 아직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SKY 니 IN 서울이니 할 게 아니라 자기가 흠모하는 스승을 찾는 것도 좋은 진학방법이고 실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예전에는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간다거나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 선비들에게는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바둑이나 음악이나 춤도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이, 혹은 위대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지금이라도 도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고 싶듯이 청년 여러분들도 일가를 이룬 위대한 스승을 선택하는 것이 휠씬 좋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을 살펴보고 스승을 찾아야지 학교만을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이젠 학력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벼슬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이제는 사라져야 합니다. 일례로 이완용은 가방 끈이 길었을 뿐 만 아니라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습니다. 올해는 배움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찾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래야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고 대학 서열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와 같은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실력이 없으면 하위 팀으로 이적되거나 도태되기 쉽습니다. 능력도 별로 없이 그저 간판을 내세우고 간판으로 버티는 우리 사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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