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름달이 둥그렇게 떴습니다. 보름달을 보니 매우 반갑고 심안이 편안해집니다. 보름달을 더 즐기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낮에 태양을 쳐다보기는 힘들고 거북하지만 달은 계속 쳐다봐도 괜찮고 볼수록 더욱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리고 달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함을 느낍니다. 오늘이 지나면 보름달도 기울 것 입니다. 달을 보니 친구 생각이 유달리 많이 납니다. 또 달을 보니 동양 사상이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아 마침 공부하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 펜을 들었습니다.
동양에서의 국가론과 국가의 본성은 서양과 다르다고 지난 편지에 적었습니다. 특히 동양사상에서는 서양사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는데 음양오행설입니다. 하지만 오늘 편지에서 음양오행을 설명하기가 여의치 않고 또 나의 학문이 미천하여 적지 않으니 널리 이해 바랍니다.
동양에서 성리학의 최고 대가는 주자입니다. 퇴계 선생이 쓴 성학십도에 주자가 ‘서명’을 논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乾)을 아버지로 삼고 땅(坤)을 어머니로 삼는 것은 모든 생명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작은 몸이 혼연히 살아 있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우리 人間을 말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같은 배속에서 태어난 형제와 같고 만물과 나는 더불어 사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내 부모의 종자이고 大臣은 종자의 가상(家相)이라 하였습니다. 결국 동양사상에서의 국가는 하늘과 땅과 그 사이의 인간 그리고 인간을 다스리는 임금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임금은 당연히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지요. 서양과 같이 몇 가지의 정체로 나누는 것은 없는데 굳이 나누자면 군주제이고 일단은 그 한 가지 정체 밖에 없다고 봐야겠습니다.
이것이 동양사상에서 바라본 국가론의 대략입니다. 동양사상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국가의 본성이나 형성은 우주와 자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는 그 근거가 물의 이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맹자의 고자장구편에서 인성이 선하다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으니 선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래로 흐르지 않은 물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노자의 上善若水(상선약수)와 같은 맥락입니다. 노자가 말하기를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고 서로 타투지 아니하며 만물을 이롭게 한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라고 하였지요. 결국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맹자는 다만 물의 본성은 선하지만 가끔 급하거나 탁한 것은 그‘기세’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예컨대 거꾸로 물이 치솟은 것이 그러하며 또 물이 황토색이 되는 것은 흙을 만났기 때문이지 원래 물의 본성은 선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맹자가 노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양에서는 자연과 우주를 언급하지만 주로 신에 근거한 논의가 많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가 신에 근거한 논의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성서에 말하는 신과 그리스 로마(신화)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성서의 창세기를 인용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회를 만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라고 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나 자연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로크는 내가 보기에 홉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고로 자연상태와 계약에 대해서는 홉스가 먼저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내가 보기엔 홉스가 더 위대한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동양사상의 입장에서 국가론을 말씀드리려 한 것이 길어 졌고 게다가 두서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치고 다음에 다시 편지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이 많아서 자주 편지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점 백분 양해를 구합니다.
‘신의 조각상에 소변을 보고, 표준관념을 깨뜨리는 것’보다 더한 파격을 실천한 인물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가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연암은 십 여 년 준비한 일생일대의 대사인 과거시험에서 나무와 바위를 답지에 그려놓고 그냥 나와 버린다. 시쳇말로 또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연암과는 조금 다르지만, 백범 역시 요지경이 된 과거시험장을 개탄하면서 결국 아버지가 시험을 본 것으로 적고 나온다. 이러한 행동 일면에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기득권에 편승하기보다 그것에 과감히 도전하고 맞서 싸운 깨인 의식과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소 부조리를 혁파하고자 한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 날 이만큼의 진보가 이루어 진 게 아닐까 싶다.
백범의 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이른바 ‘치하포 사건’이다. 得樹攀枝未足奇(득수반지미족기), 懸崖撒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서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대장부다. 라는 뜻이다. 이 詩는 冶父道川선사의 禪詩이고 그의 스승인 후조 고능선에게 배운 대목다. 김구선생이 왜놈 스치다를 발견하고 거사를 결심할 때 결정적으로 힘을 준 구절이다.
연암 박지원이 과거시험 답안지에 나무와 바위를 그려 놓고 나오는 배짱, 백범이 ‘懸崖撒手丈夫兒 현애살수장부아’를 행하는 결단력 그리고 ‘신의 조각상에 소변’을 볼 수 있는 파격. 바로 이것이 오늘날 나에게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들이다. 누가 나를 욕하든 말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임진왜란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체제이다. 재조지은이란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뜻이고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외교적 인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과 가치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횡행한 것을 재조지은체제라고 한다. 물론 왜란 전에도 조・명 관계는 조공을 올리고 책봉을 받는 사대관계였다.
전쟁을 도와 준 은혜는 고마운 일이 분명하나 전쟁 이후는 물론 심지어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지나친 보은과 사대를 강조한 것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국제관계는 개인적 관계와는 다르고 또 명분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 시 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의 위상과 양국 간 지정학적 관계, 그리고 조선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임진왜란 후 재조지은이 어느 정도로 위세를 떨쳤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명나라 황제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를 충북 괴산에 세우고 이여송, 양호, 형개 등의 장수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미 명나라는 멸망(1644)하고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이러한 재조지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송시열(1607-1689)이다. 언급했듯이 은혜에 보답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은 좋으나 청나라라는 새로운 패권국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전혀 없고 오로지 감정만 앞세우는 것은 국제정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미 명나라를 접수한 새로운 패권국인 청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조선의 태도는 한마디로 가당찮은 일이었다. 정묘 ・ 병자호란은 결국 이러한 연유에서 발생하였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금, 청과 같은 오랑캐 나라와는 상종 조차하지 않고 북벌을 외치던 인조는 지금의 잠실 석촌 호숫가에서 동지섣달 얼어붙은 땅에 코가 닿도록 청의 홍태지에게 삼배를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 혹은 실리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인조가 북벌을 주장한 것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국제정치를 보는 안목이 부족했고 그 이면에는 교조적 성리학과 당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북벌도 중요했지만 오히려 우리나라를 친 일본 즉 왜벌을 주장했어야 했다.
재조지은의 사상적 배경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일점일획도 감히 고칠 수 없는 지고지선의 가치였을 뿐 아니라 생사가 오가는 무서운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인조 이후 줄기차게 북벌을 외치고 순조 대代 까지 재조지은을 고수한 결과, 불행히도 또 다시 일본에게 먹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식민지배가 끝나고 광복을 맞았으나 다시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이번에는 우리 끼리 총칼을 들고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아직도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비극인가. 더 큰 문제는 ‘제2의 재조지은’ 이 이 땅에 자리 잡게 된다는 점이다. ‘제2의 재조지은’ 을 아는가?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또 인간이란 ‘이성’과 ‘합리’를 주창하기 이전에는 오직 ‘신의 피조물이었고, 자연의 일부’였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자연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무한히 가공되고 지배되며 대상화되었다. 이른바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기어이 자연위에 군림하고 말았다. 근대 이후 오로지 과학 기술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과 오만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수백 년 동안 근대의 자연 지배 패러다임이 한창 일 때, 마침내 세계를 진동케 하고 공포로 몰아넣은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자연의 분노 이든 신의 공격이든, 참사의 원인에 골똘하기보다 대자연 앞에 겸허하고 반성하고 공존하라는 인간을 향한 일종의 옐로우 카드임을 알아야 한다. 차제에 일본 뿐 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는 물론 전쟁과 민중 봉기도 예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운의 도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가본 사람이라면 핵폭탄의 위력과 참혹함을 잘 알 것이다. 당시 피폭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는데 그 참상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한편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1945년 8월과, 2011년 3월의 일본 상황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역은 핵폭탄 투하로 도시 전체가 궤멸되었다. 추풍낙엽처럼 집과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앙상한 건물 뼈대만이 황량하게 남았다.
지금의 도호쿠 지진 쓰나미는 후쿠시마와 센다이 주변 도시를 삽시간에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노아의 홍수를 뺨치는 거대한 수마는 도시 전체를 아예 휩쓸어 버렸다. 두 개의 사건이 교차하면서 허망함과 비애와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일본은 세계 최초의 피폭국가이기에 누구보다도 핵의 파괴력과 위험성을 잘 안다. 현재 일본이 가동 중인 핵발전소는 대략 100기로 추정한다. 그중에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이번 지진으로 폭발사고가 났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진대地震帶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외부의 핵 공격도 문제이지만, 자체 핵사고로도 큰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걸 이번 사태가 잘 대변해 준다. G1이니 G2니 하는 국가도 이 같은 재앙 앞에는 속수무책이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하자. 현재 우리나라는 월성, 고리, 영광, 울진에 약 20기 내외의 핵발전소가 있다. 아직까지 큰 사고는 없지만 알게 모르게 작은 사고는 여러 번 있었다. 내 고향이 울산인데 동쪽으로는 월성, 남쪽으로는 고리 핵발전소가 있다.
또 울산에는 각종 화학 공장이 많아 자연재해로 인한 사고나, 다른 이유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과학이 발달한 만큼 더욱 위험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지진이라는 재앙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핵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지도 알아야 한다. 일단 핵분열 생성물질은 방사능을 내게 되는데, 이것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의 재’라고도 부른다. 만약 피폭을 당하면,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사망하거나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들이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다. 결국 핵발전소는 국가의 에너지 공급을 위한 커다란 도박이고 모험 인 셈이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가공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하고 발칙한 상상, 그 상상이 만든 거대한 아방궁은 일순간에 초토화 된다는 걸 이번 기회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과학 기술로써 생크림 맛 보다 더 짜릿한 쾌락을 맛볼 수 있다지만, 그 쾌락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전체가 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과학 기술만을 맹신하고 자연에 패역을 부릴게 아니라 자연과의 화해를 통해 인간 · 자연 · 과학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구 백범 선생은 1876년생이다. 그의 나이 17세 되던 1892년, 황해도 해주에서 경과(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살사하는 과거) 가 있었다. 백범이 이 과거 시험을 치기로 마음먹고 준비에 들어간다. 백범과 그의 부친은 과거 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만 정선생이라는 분의 도움으로 시험 준비를 그런대로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험 당일 과거장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과거장은 원래 수험생이외는 들어 갈 수가 없는데 특히 조선후기에 문란해져 여러 사람이 들어가는 폐해가 생긴 것이다. 또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난리였다. 초시를 보려고 乞科(걸과)하는 모습은 그마나 보아 넘길 만 했으나, 대작 대필을 하는 경우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사정이 그 지경에 이르자, 백범은 걸과 즉 노인들이 시관(시험감독관) 에게 한번만 응시하게 해달라는 광경을 보고서 결국 과거 답안지에 아버지 아름을 쓰고 자기는 나중에 응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통인(일종의 사환)하는 자들이 시험답안지를 감독관에게 보이지도 않고 도적질을 해가고 남의 글을 보고서 자기의 글로 제출 하는 사람, 게다가 돈을 주고 합격하기도하고 大臣(대신)에게 빽을 써서 합격하기도 한다.
심지어 감독관의 수청 기생에게 주단을 몇 필 주고 합격하는 이도 있었다. 결국 백범은 이러한 과거 시험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다른 공부와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다.
김구선생보다 과거 시험보다 더 흥미로운 역사를 나는 보았다. 그가 바로 연암 박지원의 과거시험에 관한 일이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서 답안지에 바위와 고목만을 그리고 나온 것이 바로 연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를 보러 가서 답안지에 그림을 그리고 나온다고 생각해보라.상상초자 할 수 없는 일이고, 당장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그 후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정철조, 백동수 등 장안의 괴짜와 걸출들과 어울리며 젊은 시절을 보내는데 그들이 바로 북학파의 한 줄기이기도 하다.
연암은 연유가 있겠으나 과거시험을 스스로 포기하고 당시 양반사회와 사회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는 격식을 싫어하는 일종의 자유인으로 살면서 고관대작들을 냉소하며 풍류와 유람으로 세상을 산 것 일테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조롱이고 부조리와 악습을 혁파하려는 것이 아닐 런지 싶다.
나는 연암이 과거시험장에서 답안지에 나무와 바위를 그려 놓고 나오는 대목을 읽고 파안대소 했다, 나는 왜 그런 배짱이 왜 없는가? 통일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이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것 보다 더 힘들고 고독하다. 때로는 마치 외과 수술과 같은 고통이 만신을 짓누르는 것 같다. ‘천국보다 낯선’ 이라는 영화를 볼 때 느꼈던 지루함보다 더 지루하다. 결국 내가, 내 삶이 참으로 경박할 뿐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매미는 여름밖에 모른다고 하였다. 내가 매미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매미는 봄도, 가을도, 겨울도 모르고 오직 한 철 여름만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미는 단 한 철만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알기에 그렇게 울어 대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때로는 매미처럼 지독하게 울어야 한다. 울지 않는 매미는 없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연암 선생은 우는 것이 웃는 것이라 했다. 아기가 어미 뱃속에서 나와 우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고 양수에 열 달 동안 갇혔다가 해방되는 기쁨의 소리이니 그것은 울음이 아닌 바로 웃음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매미도 우는 게 아니라 웃는 것이고 노래하는 것일테다.
내가 외롭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그러하다.또 내가 외롭다는 것은 결국 칠정과 상통하고 서로 연결된다. (喜,怒,哀懼,愛,惡,欲) 기쁨과 슬픔이 그러하고 사랑과 미움도 그러하다. 매미가 한 여름에 웃듯이,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 웃듯이 나도 우리도 호탕하게 웃으며 걸어가리라.
대개 사람을 평가할 때, 어느 대학 출신인가를 보게 된다. 나도 그리 심한 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대학 간판을 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 와서는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에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글을 잘 쓰는 가로 바꾼 것이다.
이른바 S대학을 나와도 글 쓰는 것을 보면 시쳇말로 '개판오분전'인 사람이 상당수다. 심지어는 민망할 정도인 사람도 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대학을 졸업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글이 소설가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말은 지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글을 그 사람의 지식수준을 보여준다. 따라서 글로써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별로 무리가 아니다. 또 글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가의 척도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글을 잘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 쓰려고 노력은 한다. 글쓰기에 관한 책울 약 20권을 읽었고 일주일에 책 두 권 정도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짧지만 하루에 한편이라도 글을 쓰려고 한다. 그래야 글을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들을 평가할 때도 민사고인가, 혹은 대원외고인가로 보지 않는다. 학교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글을 먼저 본다. 토론 대회에 나온 대상 수상자들의 글을 보면 글의 내용이 장난이 아닌 경우가 많다. 언젠가 글이 이게 뭐냐고 조금 나무랐더니 그 친구 왈, “내가 작가가 될 것도 아닌데요. 뭘!”
통일교육문화원은 통일을 주제로 토론과 논술 대회를 11번이나 개최했다. 이번 대회부터는 글쓰기 능력을 예년보다 높게 평가하기로 했다. 글쓰기가 제대로 된 후에 토론을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간혹 토론만 잘하면 되지 라는 생각과, 토론을 말 잘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도 이참에 환기시키고자 한다. 통일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논리적인 글을 쓴 후에 상호 토론을 하는 게 순리이다.
통일교육문화원은 청소년들에게 글쓰기 능력을 우선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토론인데 토론 역시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과 상대를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언급했듯이 작가만이 글을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회에 진출하여 어떤 직업을 갖든 글쓰기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글을 읽고 글쓰기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우리가 왜 글을 잘 써야 하는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하버드대학의 교육목표는 세계적인 리더를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국의 대통령부터 정치, 외교, 행정, 비즈니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하버드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하버드대학이 하버드 출신을 배출하면서 가장 신경쓰는 분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글쓰기’입니다. 작가양성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졸업생을 모두 언론사 기자를 만들 것도 아니면서, 왜 글쓰기과목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도 안 시켜주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이 명문대학이 목표로 하는 세계적인 리더의 양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이 글쓰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렇게 철저히 글쓰기교육을 시키는 학교이기 때문에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 대학 교육대학원의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 교수는 『하버드 수재 1,600명의 공부법』에서
"하버드생들이 4년 동안 가장 신경쓰는 분야가 바로 글쓰기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은 대학생활은 물론 직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다."라고 강조합니다.
하버드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글쓰기 프로그램을 갖고 있습니다. 1872년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익스포스(Expos)'라고 부르는데, 바로 논증적 글쓰기 프로그램(Expository Writing Program)입니다. 그들이 '하버드의 전통' 이라고 자랑하는 이 프로그램은 하버드에 입학하면 누구나 한 학기를 수강해야 하는 과목입니다.
프로그램이 녹록치 않습니다. 굉장히 '빡셉'니다. 익스포스10, 익스포스20, 익스포스52 등 세 단계가 있는데, 여러 편의 논문을 써야 하는 것은 기본이지요. 논증전개 방법, 근거자료를 종합하고 인용하는 방법, 표절을 피하는 방법, 문장이나 단락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방법, 문체론 등을 배웁니다. 문장유형, 메타포, 리듬, 아이러니, 역동성 등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베이컨, 에머슨, 디킨슨, 로렌스, 오웰 등의 작품 문체에 대해 토론도 합니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이 프로그램의 교수진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입니다. 모두 40여 명인데, 이들 가운데 전공이 영국 문학이거나 미국 문학인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철학, 미국 역사, 유럽 역사, 환경, 문화인류학, 러시아 문학, 사회학, 대중문화, 시각문화, 공연, 음악, 생리학 등 전공도 관심분야도 가지가지입니다. 켈트문학을 전공하고 가수와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글쓰기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백그라운드를 가진 교수진이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글쓰기 테크닉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전개과정을 가르친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영문학과 교수가 어떻게 천체과학에 대한 글쓰기를 지도하겠습니까? 글쓰기 자체를 이미 문학에서 완전히 떼어내 오히려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으로 옮겨놓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글쓰기 가이드책자도 종류가 가지가지입니다. 심리학 관련 글쓰기, 종교학 관련 글쓰기, 동아시아 연구에 대한 글쓰기, 생명공학에 대한 글쓰기, 철학에 관한 글쓰기, 음악에 대한 글쓰기 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공학에 대한 글쓰기 가이드를 보면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글쓰기는 다른 과학자들은 물론 과학에 대한 아이디어와 과학적 발견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과학을 연구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실험노트를 작성하고, 연구제안서를 쓰고, 연구논문 형태로 스토리를 얘기하는 것 모두가 과학적 사고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래서 이 가이드책자에는 실험노트, 연구제안서, 연구논문, 과학논문에 대한 비판과 대중을 위한 글쓰기 등에 대한 상세한 방법론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익스포스의 이 '생명공학 글쓰기강좌' 가 두 가지 접근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는 글쓰기를 통해 과학적 사고를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 또 하나는 과학을 통해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좌는 자신의 과학전공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익스포스에 들고 와서 글쓰기를 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한마디로 글쓰기 커리큘럼과 과학 커리큘럼이 통합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야 훌륭한 작가이자 훌륭한 과학자를 배출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하버드는 익스포스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글쓰기와 사고력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훌륭한 사고력은 훌륭한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하버드대학뿐만 아닙니다. 경제계의 리더를 육성하는 비즈니스 스쿨도 마찬가지입니다. 와튼스쿨은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교육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학생이 '글쓰기세미나'를 수강해야 합니다. 비판적인 사고와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와튼스쿨은 비즈니스 교육을 예술, 과학 교육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또 인디애나대학 켈리스쿨은, 글쓰기만 따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업에서 글쓰기, 말하기, 듣기, 팀워크를 통합시킨다고 합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는 이 대학의 스밀(Smeal) 비즈니스스쿨의 글쓰기 모듈을 전학생이 수강해야 합니다. 리치먼드대학의 한 회계학 교수는 자신의 중급회계학 수업에서 비즈니스와 관련없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에 대해 페이퍼를 쓰라는 숙제를 낸다고 합니다.
미국의 기업들도 글쓰기능력을 우선순위에 두고 인재를 뽑고 있습니다. 글쓰기 능력은 비즈니스 전공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베스트뱅크, 컨설팅회사뿐 아니라 테크놀로지회사까지 리쿠르팅 기준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온 나라가 글쓰기에 목숨 건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습니다. 스스로 리더국가로 자부하는 미국인 만큼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입-대학교-입사-직장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큰 굽이마다 글쓰기능력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교육됩니다. 대입전형에서는 학업성적 외에 SAT, 과외활동 및 수상경력, 추천서, 면접 그리고 에세이 등을 요구합니다. 이 가운데 에세이는 단독항목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SAT 내 과목으로도 지정돼 있습니다. 글쓰기로 대학가고 글쓰기로 취직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닙니다.
2007년 '미국대학설명회'를 위해 한국에 온 하버드대 낸시 소머스 교수는 국내 한 주간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습니다. 소머스박사는 익스포스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버드는 사회에서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익스포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단순한 학습효과를 뛰어넘어, 능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지난 사회인으로서의 덕목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다. 생각을 탄생시키는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학문적인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분야에 꼭 필요한 과제다."
정리하면, 공부를 잘 시키기 위해서 뿐 아니라 능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그렇게 모질게 글쓰기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재양성이나 리더교육을 위해 왜 글쓰기가 이렇게 중요한 걸까요? 보다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보다 합리적인 사고의 정리를 위해 글쓰기보다 더 유효한 수단은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고, 글로써 보다 명료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보다 선명한 '소통'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위로 납작 짓눌리지 않고 세대구분 없이 원활하게 '소통'하고, 자기 삶의 키를 스스로 쥐고 살아가며, 나아가 어떤 분야에서든 리더가 되려면 이렇듯 글쓰기능력이 필수적입니다.
목사를 흔히 영적 지도자라고 한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도자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 지도자는 아니다. 교회 뿐 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든지 마찬가지다. 이것은 부적격자가 그 만큼 많다는 것이다. ‘목사 지도자론’ 은 일단 차치하고 여기에서는 논할 게 따로 있는데, 맨 마지막 부분에서 논하고자 한다.
그제 L 목사님을 만났다. 오늘날 목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목사의 역할’을 짧은 시간에 구체적으로 말하기엔 무리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 진보했고,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만난 L 목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 역할이 오늘의 현실에 더 적합하다고 했다.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일리가 있는 얘기다.
또 한 가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목사가 성경 외에 인문 사회 과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야 하는가이다. 개인적으로 목사는 인문 사회 과학에 밝아야 하고, 그것은 결국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 성경만 읽고 기도만하는 시대는 더욱 아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는데 이것도 기실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는 게 아닌가. 성령 충만을 기적이 나타나고 영안이 열려 신과 직통으로 대화하는 것으로만 보면 곤란하다.
이쯤에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선의 최고 성군 세종은 신하보다 자신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기에 대신들 역시 백성보다 자신들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본론이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게 첫째 덕목이다.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수능을 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 보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오늘날의 위기는 다름이 아닌 바로 지도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천박한 의식에 사로잡히고 윤리마저 무너져버린 자본주의에 매몰된 것이다.
국회의원이니 장차관이니, 교수 박사 등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 적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아예 공부하고는 담을 쌓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해도 그 자리가 보전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른바 자기의 일에 대해 내공이 있을 리 만무하고 사회는 더욱 경박해지는 것이다. 사회 지도자가 이 모양이니 일반 국민들을 오죽하겠는가.
10대 고등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게 아니라, 지도자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비로소 나라가 제대로 서게 된다. 부적격자를 자연스럽게 도태시키고 실력 있는 적격자가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종이 왕이 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이 얼마나 세상을 괴롭게 하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항상 공부하고 실력을 키우고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도자이고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자이다. 오늘 날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고 이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
원평 김기환
참고로 여기에 종교와 분야를 초월하여 목사가 주역을 강의한 책이 있어 이참에 소개하고자 한다.
"주역실의"의 저자 이치문목사의 주역강의
▲ 저자 이치문 목사
주역(周易)은 무슨 신비한 책이 아니다. 먼 옛날 성현(聖賢)들이 자연현상을 보고 세상과 삶의 이치를 생각하여 정리해 낸 지혜서이다. 주역이 부호와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혼란을 야기(惹起)하고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이 건이이지곤이간능(乾以易知坤以簡能) 즉, “하늘의 이치는 간이(簡易)하여 알기 쉽고, 땅의 이치는 간단(簡單)하여 좇기 쉽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수 있듯이 주역은 매우 알기 쉬운 경전이다.
임금에게는 밝은 정치, 정의로운 사회, 백성에게는 반듯한 삶을 위한 지혜서요 철학책이다. 주역은 임금이나 백성들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몽학(蒙學) 선생이다. 누구나 주역이 말하고 있는 바를 실천한다면 변화를 일으켜 복을 얻는다는 것이 주역(周易)의 역(易)이 가지고 있는 뜻이며, 의도하는 목적이다. 주역은 세상과 삶의 이치로만 보면 가히 성경과 견줄만한 지혜서이다.
그러면 왜 공자(孔子) 같은 성인(聖人)이 단박에 깨치지 못하고 위편삼절(韋編三絶) 즉, 책을 꿰어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으며, 그러고도 이해를 하지 못하여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생명을 더 연장해주어 내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주역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게 된다면 나의 인생에 큰 허물이 없으리라.(子曰加我數年五十以學易可以無大過矣, 論語述而)”고 고백하였으며, 수천 명의 대가들이 주역을 주석(註釋)했는데, 그 주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역림삼천(易林三千)이라는 말이 생겨났는가? 더욱이 동양 제일의 고전이요, 지혜(智慧)의 보고(寶庫)인 주역이 어찌하여 몽상(夢想)이 난무하는 점서(占書)가 되었는가? 그 이유는,
첫째, 그동안 괘 이름을 잘못 읽고 있었다. 부호로 이루어진 64괘의 이름은 아래의 부호로부터 위의 부호로 읽어야 한다. 맨 아래의 효를 초효(初爻)라 하고, 맨 위의 효를 상효(上爻)라 부르는 것과 같이, 아래 소성괘에서 위의 소성괘로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제7괘 지수사(地水師)는 수지사로, 제15괘 지산겸(地山謙)은 산지겸으로, 제33괘 천산돈(天山遯)은 산천돈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괘의 정확한 의미를 알수 있다. 주어가 바뀌면 그 의미는 천지차이다.
水地師 물은 땅을 정복하는 군대다. 물이 땅위를 흘러가는 것이 마치 군대가 대오를 지어 적진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연상하게 한다. 군자는 땅을 정복하는 듯이 일사분란하게 대오를 지어 흘러가는 물을 보고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즉, 단체에는 대오(隊伍) 곧, 규율이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山地謙 산은 땅보다 높지만 땅에 겸손하다. 군자는 산이 높지만 땅에 겸손한 것을 보고 배움이 있어야 한다. 즉, 겸손한 자세로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山天遯 산이 하늘아래 숨는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과 그 키를 경쟁할 수 없다. 하늘과 다투지 않고 물러나 숨는다. 군자는 이를 보고 나가고 물러감을 배워야 한다. 즉, 강한 자와 다투지 말아야 한다.
둘째, 자연현상의 조화를 뜻하는 괘를 이해하지 못했다. 64개로 나눈 자연현상 각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말하고자 하는 핵심주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제10괘 택천리(澤天履)는 “비구름이 하늘을 밟고 서 있다. 즉, 비구름에 물이 가득 차 있어(풍부하여, 이미 충분히 부자다), 곧 비가 내릴 것이다(베풀다. 남을 돕다)”로 해석해야 한다. 이에서 리(履)괘의 핵심주제는 “가진 자는 베풀어라”이다. 그러므로 卦辭 履虎尾不咥人亨은 “호랑이도 베풀면 은혜를 갚는다”로 새겨야 한다.
제29괘 감위수(坎爲水)는 아래도 물 위도 물, 물속에 잠겨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물은 재물 곧, 돈을 뜻하므로 감(坎)괘의 핵심주제는 “돈 돈 하면서 돈 속에 파묻혀 살지 말라” 즉,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이다. 이에서 初六 習坎入于坎窞凶은 “돈을 너무 헤프게 써 마지막 남은 재산(坎窞)까지 다 탕진하는구나. 흉하도다.”로 해석해야 한다. 제56괘 산화려(山火旅)는 “산이 불을 여행시켜준다” 즉 “산의 나무를 땔감으로 이용해 산불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여행 한다”라는 뜻에서 려(旅)괘의 핵심주제는 “남의 희생 위에 내 이익을 취하지 말라”이다.
제59괘 수풍환(水風渙)은 물이 바람을 이용해 흩어지는 것과 같이 무엇인가를 지렛대로 이용하라는 괘다. 이에서 九二 환분기궤회망(渙奔其机悔亡)은 “도마를 부지런히 물로 씻으면 후회가 없으리라”로 해석해야 한다. 즉, 고기를 잘라 파는 도마를 깨끗이 하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업환경을 청결히 하여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렛대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3,000여 년 전에도 클린 사업장 개념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渙 물 출렁출렁할 환, 물 흘러 흩어질 환, 机는 도마를 뜻한다. 机上肉 도마위의 고기, 机上肉不畏刀 도마위의 고기가 칼을 두려워하랴! 이미 죽은 목숨인데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
주역실의 590쪽 양장 36,000
원앤드원북스 (T 017-701-7327) 프리존뉴스 백종원 기자 (jwbaek8390@empal.com)
허균은 자신이 사는 집의 이름을 사우재(四友齋)라고 하였다. 그것은 벗과 자신을 합하면 모두 넷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벗이란 허균이 살아생전에 이미 사라진 옛 선비들이다.
첫째는 진나라 처사 도연명이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그는 한가롭고 고요하며 작은 일에 대범하여 항상 마음이 편안했으니,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편히 여기고 천명을 즐기다가 죽었다. 그의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히 높아 잡을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연명을 깊이 흠모만 할 뿐, 그 경지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은 당나라 한림 이태백인데 그를 좋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뛰어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 여기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귀인들을 개미 보듯 하며 스스로 자연 속에서 방랑했다" 그런 그가 부러워 따라 배우려고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송나라 학사 소동파이다. 소동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이나 천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더불어 즐기니, 유하 혜가 자기의 덕을 감추고 세속을 좇는 풍모와 같은 데가 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으로 벗을 삼고 굳이 속인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여겼다.
나는 허균의 경지에는 티끌만치도 따라 갈 수 없어 다음과 같은 벗을 두었다. 첫째는 동서양의 고전을 벗으로 하였다. 고전의 매력을 사람으로 치면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의 윙크보다 진하기 때문이고 우리나라의 경광 중에는 보름달이 뜬 해운대 바다보다 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글을 쓰는 게 나에는 큰 벗이다. 글을 쓰는 것은 말과 같이 날아가지도 않고 그대로 남게 될 뿐 아니라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수 있어 어떤 벗과의 친함보다 비할 길이 없다.
셋째는 내가 연주하는 기타Guitar 다. 기타로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때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의 심안이 평온함은 물론 온 사물이 다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축구)공이다. 공이 하나있으면 땀을 흘릴 수 있어 운동으로 적당하다. 그리고 공은 항상 둥글어 모나지 않아 어디로든지 잘 굴러간다. 이 네 가지가 나의 벗이다.
그런데 아직 내 집 이름을 짓지 못했다. 고향 이름을 따서 심포서원이라 했는데 서원이라는 게 너무 흔해 온전히 정하지는 않았다. 또 인터넷 블로그에 지을까 시골 농가를 하나 구입할까 이것도 생각 중이다.
내가 이들과 벗하는 이유는 통일문제와 동북아 국제관계를 공부하면서 약간의 문약에 빠진 것 때문이고 학문을 학문답게 하지 못했기에 이제는 고전을 탐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 박사라는 것이 해외에서나 국내에서나 학문적인 내공이 다소 부족한 것을 서로가 잘 아는 바이니 이것은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공부하지 못한 것이 그 연유라 하겠다. 내가 요즘 고전 읽기에 몰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창하게 ‘경제’라고 말할 필요 없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코앞이다. 정치적 대립과 반목은 정권이 바뀌어도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회는 역사상 보기 힘든 대장관을 보여주었고, 2월에 또 한 번의 리턴매치가 예고되어 있다. 소통과 협력보다는 불통과 충돌이 난무하고 사회 도처에 갈등의 뇌관이 널려있다. 이 틈바구니 속의 서민들은 곤고하다 못해 낙담하고 좌절하게 된다.
필자는 청년시절 문학깨나 한답시고 어쭙잖게 우쭐대던 때가 있었다. 박인환의 시에 등장하는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버지니아에 사는 늑대쯤으로 치부한 것이다. 그 결과 또래의 문학도들로 부터 참담할 정도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추억으로 머쓱한 웃음을 자아내지만, 중년이 된 지금 그와는 또 다른 참담함을 느끼는 묘한 역설의 역사를 살고 있다.
버지니아울프는 빅토리아 시대의 권위적이고 오직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했다. 목을 죄는 듯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에 스스로 템즈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박인환은 그녀를 애도하며 전후 한국사회의 사랑이 죽고, 인생이 죽고, 문학이 죽었다는 상실의 시대를 노래했다.
1931년에서 1945년 일본은 천황과 군국주의자들의 광기 외 다른 가치는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의 작가 사카구치는 숨을 쉬기 힘든 ‘폭압적 구조’를 스스로의 ‘타락’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세 사람 모두는 ‘자학’(?)을 통하지 않으면 ‘존재’가 불가능했고, ‘존재’하기에는 세상과는 늘 ‘불화’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정녕 희망은 없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분명 희망은 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양보다. 살다보면 “누가 먼저 양보해야 하는가?” 란 명제에 부딪힐 경우가 있다. 그렇다. 소통과 협력과 평화를 위해서는 ‘양보’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중국 한나라 때 태자가 행차하고 있었다. 때마침 옛 스승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볼품없는 늙은이로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 때 태자가 옛 스승에게 말하기를 “누가 먼저 겸양을 갖춰야 합니까?”라고 묻자. “부귀한 자가 먼저 겸양을 갖춰야 한다. 빈천한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지 않느냐”고 했다. 남북관계에 있어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당장 내일 끼니가 걱정인 빈천한 자에게 먼저 양보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북한이 더 이상 잃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둘째, 소통(communication)이다. 소통은 상호간의 의사전달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 간의 소통이 아닌 ‘집단 간의 소통’이어야 한다. 그리고 ‘구존동이’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마지막은 인내다. 성서에는 형제끼리 비판하고 싸우는 것을 율법에 대적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좌우, 진보, 보수, 여야 할 것 없이 우리 내부부터 생채기 내는 일을 삼가자.
불교에서도 ‘구업’ 즉 말로 짓는 죄가 중하다. 절제된 언어와 경청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내다. 맹자의 공선추 편에서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 했다. 즉 하늘의 이로움은 땅의 이로움보다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2009년 소의 해에는 양보와 아량과 인내를 가져보자. 그래서 소통하고 희망을 노래하자. 비록 느리지만 우직하고 힘이 세도 싸우지 않고 언제나 여유 있는 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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