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선생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한학을 열심히 공부하였고 함흥보통학교와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 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1922년에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지리·박물과로 전과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도쿄 유학 당시 일본의 국군주의에 반대하고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를 주창하던 그리스도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에서 성서 교육을 받았고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양정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는데 손기정이 대표적인 제자다. 그리고 송두용, 유석동,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과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하여 소위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였다.

나는 평소 김교신의 사상이 어떠한 것인지 궁굼했다. ‘무교회주의자’라고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어느 날 김교신 전집을 발견하고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7권 중 3권만 읽고 중단했다.
단순히 김교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무교회주의라는 테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서적과 주변 학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교신을 알기 전에 우찌무라 간조에 대해서 알아야 했고, 우찌무라간조를 따라가면 루터와 칼빈에 대해 알아야 했고, 그것을 따라가면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귀중한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었다.
생각한 끝에 김교신에 대해서는 그가 강조한 핵심적인 내용만 알고 자세한 것은 또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다. 김교신은 우선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찌무라 선생의 영향탓이다. 세상의 어떤 책보다 성서가 최고이고 제일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글래스톤 옹의 예를 든다. 그는 80세를 넘게 살면서 약 1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60년 동안 일 년에 166권을 읽어야 만권이 된다. 대단한 독서량이다. 우리가 읽은 책이 천권이나 될까?
칼라힐이 영국과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는 얘기, 단테의 신곡은 몽블랑보다 크고,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지중해보다 높고, 아무렐리스의 명상록은 남아연방을 덮고, 마호메트의 코란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고, 석가의 팔만대장경은 인도양은 가리고 공자의 논어는 곤륜산맥을 덮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책들을 읽거나 많은 양의 책을 읽는 것 보다는 오직 한권이 최고의 책인데 그것이 바로 ‘성서’라는 것이다.
두 번째 김교신은 기성교회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성서조선 창간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도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는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라.” 고 적고 있다.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매우 단호한 입장이다.
세 번째는 성서연구이다. 그는 성서연구를 중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성서연구회’다. 그리고 월간으로 성서조선을 발행했다. 이 또한 우찌무라의 영향이 크다. 우찌무라가 강조하는 것 중에 설교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설교가 바로 성서이고 읽는 이가 교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김교신 역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고 성서조선 출간에 생애를 바쳤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김치 맛나고 조선 혼을 가진 기독교를 꿈꾸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당시가 일제 식민지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미국선교사들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김교신 선생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내가 평소 알고 있던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선생이 왠지 모르게 혁명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론은 그는 또 다른 형태의 복음주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김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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