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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소통 그리고 희망
2009년 01월 14일 (수) 김기환 webmaster@yongin21.co.kr

   
▲ 김기환(통일교육문화원 평화교육센터 소장·본지 객원논설위원)
거창하게 ‘경제’라고 말할 필요 없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코앞이다. 정치적 대립과 반목은 정권이 바뀌어도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회는 역사상 보기 힘든 대장관을 보여주었고, 2월에 또 한 번의 리턴매치가 예고되어 있다. 소통과 협력보다는 불통과 충돌이 난무하고 사회 도처에 갈등의 뇌관이 널려있다. 이 틈바구니 속의 서민들은 곤고하다 못해 낙담하고 좌절하게 된다. 

필자는 청년시절 문학깨나 한답시고 어쭙잖게 우쭐대던 때가 있었다. 박인환의 시에 등장하는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버지니아에 사는 늑대쯤으로 치부한 것이다. 그 결과 또래의 문학도들로 부터 참담할 정도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추억으로 머쓱한 웃음을 자아내지만, 중년이 된 지금 그와는 또 다른 참담함을 느끼는 묘한 역설의 역사를 살고 있다.

버지니아울프는 빅토리아 시대의 권위적이고 오직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했다. 목을 죄는 듯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에 스스로 템즈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박인환은 그녀를 애도하며 전후 한국사회의 사랑이 죽고, 인생이 죽고, 문학이 죽었다는 상실의 시대를 노래했다.

1931년에서 1945년 일본은 천황과 군국주의자들의 광기 외 다른 가치는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의 작가 사카구치는 숨을 쉬기 힘든 ‘폭압적 구조’를 스스로의 ‘타락’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세 사람 모두는 ‘자학’(?)을 통하지 않으면 ‘존재’가 불가능했고, ‘존재’하기에는 세상과는 늘 ‘불화’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정녕 희망은 없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분명 희망은 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양보다. 살다보면 “누가 먼저 양보해야 하는가?” 란 명제에 부딪힐 경우가 있다. 그렇다. 소통과 협력과 평화를 위해서는 ‘양보’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중국 한나라 때 태자가 행차하고 있었다. 때마침 옛 스승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볼품없는 늙은이로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 때 태자가 옛 스승에게 말하기를 “누가 먼저 겸양을 갖춰야 합니까?”라고 묻자. “부귀한 자가 먼저 겸양을 갖춰야 한다. 빈천한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지 않느냐”고 했다. 남북관계에 있어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당장 내일 끼니가 걱정인 빈천한 자에게 먼저 양보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북한이 더 이상 잃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둘째, 소통(communication)이다. 소통은 상호간의 의사전달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 간의 소통이 아닌 ‘집단 간의 소통’이어야 한다. 그리고 ‘구존동이’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마지막은 인내다. 성서에는 형제끼리 비판하고 싸우는 것을 율법에 대적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좌우, 진보, 보수, 여야 할 것 없이 우리 내부부터 생채기 내는 일을 삼가자.

불교에서도 ‘구업’ 즉 말로 짓는 죄가 중하다. 절제된 언어와 경청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내다.
맹자의 공선추 편에서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 했다. 즉 하늘의 이로움은 땅의 이로움보다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2009년 소의 해에는 양보와 아량과 인내를 가져보자. 그래서 소통하고 희망을 노래하자. 비록 느리지만 우직하고 힘이 세도 싸우지 않고 언제나 여유 있는 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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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에 대해 내가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책임을 다 하고자 하고
북한과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 그리고 작은 봉사를 공동체와 함께
일구어 나가고자 그저 소박함으로 하루을 일하고자 한다.
2009/01/14 15:22 2009/01/14 15:22
Posted by 김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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