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을 도와 준 은혜는 고마운 일이 분명하나 전쟁 이후는 물론 심지어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지나친 보은과 사대를 강조한 것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국제관계는 개인적 관계와는 다르고 또 명분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 시 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의 위상과 양국 간 지정학적 관계, 그리고 조선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임진왜란 후 재조지은이 어느 정도로 위세를 떨쳤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명나라 황제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를 충북 괴산에 세우고 이여송, 양호, 형개 등의 장수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미 명나라는 멸망(1644)하고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이러한 재조지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송시열(1607-1689)이다. 언급했듯이 은혜에 보답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은 좋으나 청나라라는 새로운 패권국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전혀 없고 오로지 감정만 앞세우는 것은 국제정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미 명나라를 접수한 새로운 패권국인 청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조선의 태도는 한마디로 가당찮은 일이었다. 정묘 ・ 병자호란은 결국 이러한 연유에서 발생하였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금, 청과 같은 오랑캐 나라와는 상종 조차하지 않고 북벌을 외치던 인조는 지금의 잠실 석촌 호숫가에서 동지섣달 얼어붙은 땅에 코가 닿도록 청의 홍태지에게 삼배를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 혹은 실리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인조가 북벌을 주장한 것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국제정치를 보는 안목이 부족했고 그 이면에는 교조적 성리학과 당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북벌도 중요했지만 오히려 우리나라를 친 일본 즉 왜벌을 주장했어야 했다.
재조지은의 사상적 배경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일점일획도 감히 고칠 수 없는 지고지선의 가치였을 뿐 아니라 생사가 오가는 무서운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인조 이후 줄기차게 북벌을 외치고 순조 대代 까지 재조지은을 고수한 결과, 불행히도 또 다시 일본에게 먹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식민지배가 끝나고 광복을 맞았으나 다시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이번에는 우리 끼리 총칼을 들고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아직도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비극인가. 더 큰 문제는 ‘제2의 재조지은’ 이 이 땅에 자리 잡게 된다는 점이다. ‘제2의 재조지은’ 을 아는가?
김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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