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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3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에서 배운다

        
                          비스마르크 시대의 독일통일

1. 통일의 배경

독일통일은 이탈리아와 같이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아울러 이탈리아의 통일에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계기로 비엔나회의에서 결정된 독일연방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독일의 여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졌다. 북부지역의 자유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의 학살자, 독일의 억압자로 불렸다. 반면 남부 독일지역 자유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주도의 독일통일을 주장하며 프랑스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였다. 이러하듯 통일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통일의 당위성과 명분은 거부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가장 눈에 뛰게 통일운동을 시작한 것은 ‘독일민족연합’이었고 이는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경제력이다. 이탈리아 통일 당시 피에몬트 중심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프러시아는 피에몬트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2. 통일의 과정

1. 윌리엄 1세와 비스마르크

  1840년 왕위에 오른 월리엄 4세 변덕스럽고 환상에 찬 성격이 광기에 이르러 결국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동생 윌리엄 1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국방장관 쿤으로 하여금 군사개혁안이 만들어졌다. 군사개혁의 핵심은 군 복무기간의 연장, 예비군의 독립성 폐지 등이었다. 이 개혁안은 자유주의 사조에 역행한다하여 프러시아 의회와 충돌하자 조정자를 구하였는데 그가 바로 당시 파리주재 대사였던 비스마르크이고 바로 재상에 추대되었다. (1862)

  2. 엘베공국 문제 발생

슬레스비히(독일연방에 속하지 아니함, 하지만 절반이 덴마크인이고 나머지 절반이 독일인임)와 홀스타인 공국( 독일연방에 속함)은 덴마크 국왕이 겸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비엔나 조약에 의하여 독일연방이 개편되면서 이들 공국의 문제로 덴마트와 전쟁까지 비화된다. 덴마크와 독일간의 충돌을 영국이 중재하였으나 무산되고 결국 두 공국은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에 완전히 넘겨 주게 되었다. 이 들 두 공국의 문제는 가슈타인 협정(1865) 으로 매듭짓게 되는데 술레스비히는 프러시아가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각각 시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었다.

  3. 북부 독일연방 성립: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의 전쟁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북부 독일이 성립되었다. 여기에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루마니아 문제였다. 루마니아는 1856년 파리회의 당시 중요한 의제였다. 루마니아는 당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공국으로 나누어 져 있었다. 이를 나폴레옹 3세가 두 공국의 통합을 주장하였으나 열강들의 주장이 각각 엇갈려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주민의 투표에 맡겨졌다. 주민투표 결과는 두 공국이 통합하는 데 반대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자 프랑스, 러시아, 사르디니아가 주민투표 결과를 무효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프랑스, 러시아 등의 무효주장에 대해 영국과 터키가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는 등 혼전양상을 띠게 되었다. 결국 어렵게 타협이 이루어 졌으나 모호한 타협이었다. 두 공국은 같은 정치적 기구로 연결되나 명분상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1859년 몰다비아에 쿠자왕이 죽위하게 되고 왈라키도 그를 왕으로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두 공국은 통합되었다. 술탄도 1862년 통합을 인정함으로써 신생 루마니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866년 2월 쿠자(A Cuza) 가 퇴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루마니아를 보유하는 대신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양여 한다는 구상을 프랑스가 동의하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베네치아를 이탈이아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을 미리 안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 프러시아 동맹을 체결할 것을 권고하고 결국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는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4. 프랑스 오스트리아 비밀조약

오스트리아는 전쟁이 다가오자 나폴레옹3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면서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받는 비밀조약을 비엔나에서 체결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오스트리아는 전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베네치아를 나폴레옹 3세에게 할양하고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다시 이탈리아로 돌려주기로 했다. 또 만일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경우 오스트리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독일연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이 비밀조약을 체결한 직 후 프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의회에서 발의하고 통과시켰다. 이유는 홀슈타인을 침범한 것이 사유였다. 바바리라, 하노버, 섹스니 등이 오스트리아에 동조하였고 프러시아 대표는 퇴장해버렸다. 전쟁은 시작되었고 이탈리아 역시 6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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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그는 이렇게 말했다."이 시대의 중대한 문제들은 마치 1848년과 1849년의 오류에서와 같이, 연설이나 다수결에 의한 결정들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철과 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5. 전황

프러시아가 먼저 오스트리아 공격하였다. 프러시아가 승리하자 오스트리아와 비밀협약을 맺은 나폴레옹 3세가 당황하게 되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시스 요셉이 나폴레옹 3세에게 베네치아를 할양할 것과 아울러 휴전을 주선하도록 의뢰하였다. 비스마르크도 대체로 이에 동의하고 평화조건에 합의하였다. 이를 니콜부르크의 예비평화라한다. 이 예비 평화조건은 주로 작은 공국들의 분할 또는 소속시키는 것인데, 하노버, 헤세, 나사우 프랑크프르트 자유시는 프러시아에 합병되고 아인 강 이북의 독일국가들은 북부 독일연방을 구성한다. 따라서 기왕의 독일 연방체제는 해체되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에서 제외된다. 남북 독일국가들은 별도로 연방을 구성한다로 압축할 수 있다.

한편 프러시아의 승리로 윌리엄 국왕과 군인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비엔나로 진격할 것을 주장하였으니 비스마르크는 지나치게 오스트리아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 차후에 좋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국왕과 군 장성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6.베네티디의 초안

  니콜부르크 예비 평화조건이 타결되자 나폴레옹 3세는 바바리아 령의 팔라티네이트 아인라트의 헤세 룩셈부르크를 보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7. 프라그 조약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전쟁은 프라그 조약으로써 완전히 종식되었다. 물론 이조약은 니콜스부르크 합의에 입각한 것이다. 이로써 각각 영토의 변동은 크게 없었다. 실제로 배상금지불도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비스마르크는 마인강 이북의 통일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1867년 국내정치 개혁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 군주국으로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각 독자적인 내각을 보유하나 외교, 군사, 전쟁 등 3개성은 단일화되었고 같은 황제로 연결되게 되었다.

  3. 프랑스 프러시아 전쟁의 배경

  1. 룩셈부르크 사건과 런던조약

 당시 룩셈부르크는 원래 독일 연방이었으나 북부 독일 연방이 새로이 구성되면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프러시아의 군대는 여전히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네델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3세는 비스마르크에게 보상을 요구하여 거절되어 룩셈부르크에 눈독을 드렸는데 프러시아의 동의를 받지 못해 결국 이 병합 기도는 러시아의 제의에 따라 런던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네델란드, 벨지움, 이탈리아 등 열강의 회의가 개최되어 런던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룩셈부르크는 영세 중립국이 되었고 영국, 프랑스.러시아, 가 중립을 보장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2. 스페인 내란과 국왕 옹립문제

 1868년 스페인 군부의 장군들간의 대립으로 국내 정치가 혼란하여 결국 세라노 장군이 정부군을 타파시켰다. 그는 곧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제헌의회를 열어 새로운 헌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 누구를 왕으로 추대하는냐가 문제였다. 여러 사람이 물망에 올랐으나 레오폴드 왕자였다

 3. 레오폴드 왕위계승 문제와 비스마르크

 프랑스로서는 묵과할 수 업지만 비스마르크는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국왕이 나와야 한다고 여론을 만들었다. 그후 비스마르크는 레오폴드를 설득하여 내락을 받아냈다. 레오폴드가 스페인 국왕에 추대된다는 사실은 안 프랑스는 흥분하였다. 결국 복잡한 상황에서 레오폴드는 잠적해 버렸고 그 후 왕위를 포기해 버렸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큰 타격을 받았다.

 4. 프랑스 프러시아 전쟁과 독일제국의 성립

엠스전보 사건 끝에 결국 프랑스와 프러시아가 서로 격분하여 전쟁을 하게되었다. 이 전쟁으로 독일제국 성립하게되었다. (1872년 1얼 18일)
독일제국의 성립(1871)25개의 정치 단위로 구성, 프러시아, 바바리아, 섹스니,부르텐부르크의 4개 왕국, 5개의 대공국, 13개의 공국, 함부르크, 브레멘, 뤼벡 등 자유시이다.


5. 이탈리아 통일과 독일 통일의 비교

1. 양국 모두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의 혁명을 지배했던 진보적 자유주의와 함께 민족주의 이념은 이탈리아는 민주헌법적 질서를 얻고 통일을 이루고 또한 이탈리아인을 통합하고 이탈리아를 통일하였다.

독일 역시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크프르트 의회에서 나타난 독일민주주의식을 오스트리아로부터 일단 분리시키고 그 후에 독일민족에 의한 통합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2. 양국 모두 일반 대중의 힘이 아닌 모두가 지식 및 통치세력에 속하는 계층의 지도력의 힘을 입은 것이다. 이탈리아는 카부르 독일은 비스마르크

차이점으로 첫째, 독일과 이탈리라는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단절 내지는 조절함으로써 통일을 성취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나라가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배제하는 방법은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는 트로파우 및 라이비하 회의 이래 오스트리아 관장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힘을 배제하는 것은 오직 무력 전쟁 뿐이었다. 그러나 프러시아는 원래 합스부르크가의 한 부분을 형성했으며 이는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연방에 결속되어 있었다.

둘째,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과정에 외부세력으로부터 받은 원조력에 있어 큰 차이점이 있다. 독일의 경우 주도세력인 프러시아는 이미 그 자체로서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중립이나 격리를 필요로 했지 외부로부터의 원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반면 이탈리아는 샤르데냐의 단독힘으로는 부족하여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도움을 받았고 프러시아의 지원도 많았다 셋째는 경제력의 차이다. 프로시아는 관세동맹으로 경제적으로 부강했고 분열과 대립의 이탈리아의 경제력은 비견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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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육문화원 김기환


김기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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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에 대해 내가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책임을 다 하고자 하고
북한과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 그리고 작은 봉사를 공동체와 함께
일구어 나가고자 그저 소박함으로 하루을 일하고자 한다.
2009/11/03 01:31 2009/11/03 01:31
Posted by 김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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