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름달이 둥그렇게 떴습니다. 보름달을 보니 매우 반갑고 심안이 편안해집니다. 보름달을 더 즐기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낮에 태양을 쳐다보기는 힘들고 거북하지만 달은 계속 쳐다봐도 괜찮고 볼수록 더욱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리고 달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함을 느낍니다. 오늘이 지나면 보름달도 기울 것 입니다. 달을 보니 친구 생각이 유달리 많이 납니다. 또 달을 보니 동양 사상이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아 마침 공부하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 펜을 들었습니다.
동양에서의 국가론과 국가의 본성은 서양과 다르다고 지난 편지에 적었습니다. 특히 동양사상에서는 서양사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는데 음양오행설입니다. 하지만 오늘 편지에서 음양오행을 설명하기가 여의치 않고 또 나의 학문이 미천하여 적지 않으니 널리 이해 바랍니다.
동양에서 성리학의 최고 대가는 주자입니다. 퇴계 선생이 쓴 성학십도에 주자가 ‘서명’을 논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乾)을 아버지로 삼고 땅(坤)을 어머니로 삼는 것은 모든 생명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작은 몸이 혼연히 살아 있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우리 人間을 말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같은 배속에서 태어난 형제와 같고 만물과 나는 더불어 사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내 부모의 종자이고 大臣은 종자의 가상(家相)이라 하였습니다. 결국 동양사상에서의 국가는 하늘과 땅과 그 사이의 인간 그리고 인간을 다스리는 임금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임금은 당연히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지요. 서양과 같이 몇 가지의 정체로 나누는 것은 없는데 굳이 나누자면 군주제이고 일단은 그 한 가지 정체 밖에 없다고 봐야겠습니다.
이것이 동양사상에서 바라본 국가론의 대략입니다. 동양사상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국가의 본성이나 형성은 우주와 자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는 그 근거가 물의 이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맹자의 고자장구편에서 인성이 선하다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으니 선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래로 흐르지 않은 물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노자의 上善若水(상선약수)와 같은 맥락입니다. 노자가 말하기를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고 서로 타투지 아니하며 만물을 이롭게 한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라고 하였지요. 결국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맹자는 다만 물의 본성은 선하지만 가끔 급하거나 탁한 것은 그‘기세’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예컨대 거꾸로 물이 치솟은 것이 그러하며 또 물이 황토색이 되는 것은 흙을 만났기 때문이지 원래 물의 본성은 선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맹자가 노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양에서는 자연과 우주를 언급하지만 주로 신에 근거한 논의가 많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가 신에 근거한 논의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성서에 말하는 신과 그리스 로마(신화)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성서의 창세기를 인용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회를 만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라고 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나 자연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로크는 내가 보기에 홉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고로 자연상태와 계약에 대해서는 홉스가 먼저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내가 보기엔 홉스가 더 위대한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동양사상의 입장에서 국가론을 말씀드리려 한 것이 길어 졌고 게다가 두서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치고 다음에 다시 편지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이 많아서 자주 편지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점 백분 양해를 구합니다.
‘신의 조각상에 소변을 보고, 표준관념을 깨뜨리는 것’보다 더한 파격을 실천한 인물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가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연암은 십 여 년 준비한 일생일대의 대사인 과거시험에서 나무와 바위를 답지에 그려놓고 그냥 나와 버린다. 시쳇말로 또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연암과는 조금 다르지만, 백범 역시 요지경이 된 과거시험장을 개탄하면서 결국 아버지가 시험을 본 것으로 적고 나온다. 이러한 행동 일면에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기득권에 편승하기보다 그것에 과감히 도전하고 맞서 싸운 깨인 의식과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소 부조리를 혁파하고자 한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 날 이만큼의 진보가 이루어 진 게 아닐까 싶다.
백범의 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이른바 ‘치하포 사건’이다. 得樹攀枝未足奇(득수반지미족기), 懸崖撒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서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대장부다. 라는 뜻이다. 이 詩는 冶父道川선사의 禪詩이고 그의 스승인 후조 고능선에게 배운 대목다. 김구선생이 왜놈 스치다를 발견하고 거사를 결심할 때 결정적으로 힘을 준 구절이다.
연암 박지원이 과거시험 답안지에 나무와 바위를 그려 놓고 나오는 배짱, 백범이 ‘懸崖撒手丈夫兒 현애살수장부아’를 행하는 결단력 그리고 ‘신의 조각상에 소변’을 볼 수 있는 파격. 바로 이것이 오늘날 나에게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들이다. 누가 나를 욕하든 말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1945년 식민지배가 종료되었다. 하지만 곧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6.25 라는 동족상잔을 치렀다. 1990년 드디어 냉전체제가 막을 내렸으나 남과 북은 여전히 대립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 남북은 물론이고 ‘남남갈등’ 역시 잣아 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언 65년 이라는 세월이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점점 평화와 멀어지는 느낌이다.
분단구조가 낳은 병폐가 여럿 있다. 그중에 아주 고약한 것이 바로 ‘이분법적 사고’ 혹은 ‘흑백논리’이다. 즉 나와 다른 것은 모두 악이고 쉽게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사고는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나아가 집단과 집단 그리고 사회 전체에 까지 팽배해 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 나와 다른 지역의 사람은 나쁘고 악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 심지어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것도 배척하는 지경이다.
그 다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판단하고 그 이면은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등포역의 노숙자를 혐오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아픔과 사연이 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또 절도범에 대해서 그를 증오하기 쉽지 그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는 헤아리지 않는다. 아니 헤아리지 못한다. 오로지 보는 것이라고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천착한다.
마지막으로는 ‘자신과 다른 것’ 혹은 ‘자신과의 차이’에 대한 배려가 없다. 오로지 자기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맞추려 한다. 자신의 방식과 가치관에 맞지 않으면 상대를 배척하고 심한 경우에는 악으로까지 몰아 부친다. 내가 볼 땐 이러한 것도 일종의 정신적 편집증이다.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어떻게 자기와 같은 생각, 자기와 같은 가치관 그리고 자기와 같은 생활방식을 남에게 요구할 수 있는 지 안타까울 뿐이다.
분단구조가 빚어 낸 이 고약한 이분법적 사고, 나아가 현상만 보는 근시안적 태도, ‘다름’에 대한 이해 부족, 이 모든 사회편 집증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각박해지고 참담해질 것이다. 그래서 흑백논리와 경도된 사고를 균형 있게, 현상만 보는 근시안을 그 이면까지 볼 수 있는 여유, 나와 다름에 대해서 한데 어우러지는 마음, 그러한 생각과 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회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첩경이다.
ps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상대의 생각도 옳다고 생각하자.
ppss 정치적 성향도 모두가 다르고 통일을 보는 시각도 모두가 다르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가설로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각자가 다르다는 것이 어쩌면 아름다운 것이고 자연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체제이다. 재조지은이란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뜻이고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외교적 인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과 가치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횡행한 것을 재조지은체제라고 한다. 물론 왜란 전에도 조・명 관계는 조공을 올리고 책봉을 받는 사대관계였다.
전쟁을 도와 준 은혜는 고마운 일이 분명하나 전쟁 이후는 물론 심지어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지나친 보은과 사대를 강조한 것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국제관계는 개인적 관계와는 다르고 또 명분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 시 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의 위상과 양국 간 지정학적 관계, 그리고 조선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임진왜란 후 재조지은이 어느 정도로 위세를 떨쳤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명나라 황제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를 충북 괴산에 세우고 이여송, 양호, 형개 등의 장수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미 명나라는 멸망(1644)하고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이러한 재조지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송시열(1607-1689)이다. 언급했듯이 은혜에 보답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은 좋으나 청나라라는 새로운 패권국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전혀 없고 오로지 감정만 앞세우는 것은 국제정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미 명나라를 접수한 새로운 패권국인 청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조선의 태도는 한마디로 가당찮은 일이었다. 정묘 ・ 병자호란은 결국 이러한 연유에서 발생하였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금, 청과 같은 오랑캐 나라와는 상종 조차하지 않고 북벌을 외치던 인조는 지금의 잠실 석촌 호숫가에서 동지섣달 얼어붙은 땅에 코가 닿도록 청의 홍태지에게 삼배를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 혹은 실리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인조가 북벌을 주장한 것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국제정치를 보는 안목이 부족했고 그 이면에는 교조적 성리학과 당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북벌도 중요했지만 오히려 우리나라를 친 일본 즉 왜벌을 주장했어야 했다.
재조지은의 사상적 배경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일점일획도 감히 고칠 수 없는 지고지선의 가치였을 뿐 아니라 생사가 오가는 무서운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인조 이후 줄기차게 북벌을 외치고 순조 대代 까지 재조지은을 고수한 결과, 불행히도 또 다시 일본에게 먹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식민지배가 끝나고 광복을 맞았으나 다시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이번에는 우리 끼리 총칼을 들고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아직도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비극인가. 더 큰 문제는 ‘제2의 재조지은’ 이 이 땅에 자리 잡게 된다는 점이다. ‘제2의 재조지은’ 을 아는가?
사단법인 통일교육문화원에서는 아래와 같이 소셜미디어를 활용하여 창의적 글쓰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청소년 기자를 모집하오니 관심 있는 청소년들의 많은 지원을 바랍니다.
| 신청자격 | - 통일교육문화원 역대 통일논술토론대회 참여자 또는 통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청소년 (대학생 포함) - 소셜미디어(스마트폰/페이스북 등) 활용에 대한 관심이 높은 청소년 - 미래 대한민국의 청소년 리더로 성장하며 글쓰기에 관심 있는 청소년 - 1주일에 1회 이상 온라인 활동 및 교육에 참여가 가능한 청소년 (필수)
| 신청기간 및 인원| 2011년 3월 30일(수) ~ 4월 18일(월) 총 80명
|참여방법| “통일을 준비하는 청소년”이란 주제로 A4지 1장 분량(글자크기 11포인트, 줄 간격 160%)의 기사를 작성 한 후 참가신청서와 함께 제출
|제 출 처| 통일교육문화원 청소년 소셜미디어 기자 담당자 또는 해당 웹사이트 (http://unme.or.kr/?mid=sm_intro) 해당게시판(비밀글첨부요) 전화 02-577-6372 | 이메일 edu@unme.or.kr
※ 첨부파일로 보낼 경우 파일명은 제출일+이름 (Ex 110330_홍길동.hwp)
|활동기간| 2011년 3월 25일~11월 30일 (사업시행 기간 내)
|활동내용 | - 미디어활용교육 : 소셜미디어 교육 수강을 통한 활용능력 습득 - 통일강의수강 : 통일준비를 통한 재원마련에 대한 이해능력 습득 - 스마트폰을 활용한 학교 현장 인터뷰 및 정기적인 통일기사 업데이트
|참가자 인센티브| - 통일교육문화원 청소년 기자증 발급 - 소셜미디어 활용교육 및 통일강의 무료 수강 - 전국청소년통일논술토론대회 본선진출 권한 부여 - 대학입시나 취업에 필요한 인증서 (체험, 봉사) 발급 인증서 내용 : 1) 미래청소년통일아카데미 수료 인증서 2) 소셜미디어 활용의 창의적 체험활동 확인 인증서
※ 소셜미디어 기자 중 TFT팀(5명 선발)에 선발된 자중 지방에 거주할 경우 모임 시 필요한 교통비를 실비 지급 함.
|합격자 통보| 모집 기간 종료 후 합격한 자에게는 1주일 이내로 자세한 교육 일정 및 활동내역을 문자나 이메일로 개별 통보함.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또 인간이란 ‘이성’과 ‘합리’를 주창하기 이전에는 오직 ‘신의 피조물이었고, 자연의 일부’였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자연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무한히 가공되고 지배되며 대상화되었다. 이른바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기어이 자연위에 군림하고 말았다. 근대 이후 오로지 과학 기술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과 오만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수백 년 동안 근대의 자연 지배 패러다임이 한창 일 때, 마침내 세계를 진동케 하고 공포로 몰아넣은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자연의 분노 이든 신의 공격이든, 참사의 원인에 골똘하기보다 대자연 앞에 겸허하고 반성하고 공존하라는 인간을 향한 일종의 옐로우 카드임을 알아야 한다. 차제에 일본 뿐 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는 물론 전쟁과 민중 봉기도 예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운의 도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가본 사람이라면 핵폭탄의 위력과 참혹함을 잘 알 것이다. 당시 피폭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는데 그 참상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한편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1945년 8월과, 2011년 3월의 일본 상황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역은 핵폭탄 투하로 도시 전체가 궤멸되었다. 추풍낙엽처럼 집과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앙상한 건물 뼈대만이 황량하게 남았다.
지금의 도호쿠 지진 쓰나미는 후쿠시마와 센다이 주변 도시를 삽시간에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노아의 홍수를 뺨치는 거대한 수마는 도시 전체를 아예 휩쓸어 버렸다. 두 개의 사건이 교차하면서 허망함과 비애와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일본은 세계 최초의 피폭국가이기에 누구보다도 핵의 파괴력과 위험성을 잘 안다. 현재 일본이 가동 중인 핵발전소는 대략 100기로 추정한다. 그중에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이번 지진으로 폭발사고가 났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진대地震帶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외부의 핵 공격도 문제이지만, 자체 핵사고로도 큰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걸 이번 사태가 잘 대변해 준다. G1이니 G2니 하는 국가도 이 같은 재앙 앞에는 속수무책이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하자. 현재 우리나라는 월성, 고리, 영광, 울진에 약 20기 내외의 핵발전소가 있다. 아직까지 큰 사고는 없지만 알게 모르게 작은 사고는 여러 번 있었다. 내 고향이 울산인데 동쪽으로는 월성, 남쪽으로는 고리 핵발전소가 있다.
또 울산에는 각종 화학 공장이 많아 자연재해로 인한 사고나, 다른 이유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과학이 발달한 만큼 더욱 위험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지진이라는 재앙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핵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지도 알아야 한다. 일단 핵분열 생성물질은 방사능을 내게 되는데, 이것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의 재’라고도 부른다. 만약 피폭을 당하면,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사망하거나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들이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다. 결국 핵발전소는 국가의 에너지 공급을 위한 커다란 도박이고 모험 인 셈이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가공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하고 발칙한 상상, 그 상상이 만든 거대한 아방궁은 일순간에 초토화 된다는 걸 이번 기회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과학 기술로써 생크림 맛 보다 더 짜릿한 쾌락을 맛볼 수 있다지만, 그 쾌락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전체가 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과학 기술만을 맹신하고 자연에 패역을 부릴게 아니라 자연과의 화해를 통해 인간 · 자연 · 과학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체제의 상이함 등 그들의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우리 사회에서 적자로 살아가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다. 이들의 정착을 위하여 정부와 민간 등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들만이 가진 장점을 적극 활용하여 통일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면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그들이 가진 장점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탈북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북한체제에서 한동안 살았던 사람이다. 때문에 남한과 북한 사회를 모두 살아본 경험이 있다. 한편 이것이 일정기간 정체성 혼란을 겪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록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지만, 서서히 남한 사회를 이해하면서 정착하게 된다. 따라서 미래 통일 한국으로 가는 시점에서 그들의 경험을 십분 활용하고 또 일정한 역할을 담당케 함으로써 일정 부분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교육문화원은 ‘탈북 청년 자원의 통일 활용 방안’에 대하여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연구 ・ 조사하였다. 자체 연구 조사는 본원에서 실시하는 ‘남한 직장 체험 프로그램’, ‘남북한 역사 아카데미’, ‘기독청년 미래통일 컨퍼런스’, ‘북한인권의 대안모색 워크숍’, ‘탈북자 금융경제 교육’ 등을 실시하였다. 문헌조사는, 연세대학교 통일학 석・박사과정에서 탈북자 관련 논문으로 하였다.
이러한 연구 조사를 통하여 얻은 몇 가지의 결론이 있다. 그 중에서 탈북청년 자원을 활용하여 미래 통일한국을 만드는 데 그들의 역할과 활용방안에 주목하였다. 우선 탈북청년들의 통일자원으로서의 활용 목적을 요약 한다.
첫째, 통일에 대한 혼란을 줄이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탈북자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체제에 대한 이해를 모두 하고 있으므로 이념과 체제 대립에서 초래되는 혼란을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둘째는, 통일과정 혹은 통일 이후에 남북한 주민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정서적, 심리적 갈등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정할 역할을 할 수 있다. 탈북자들은 남한과 북한 두 개의 사회를 모두 경험했으므로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적절히 해 낼 수 있다.
셋째, 통일 전인 현재의 시점에서 탈북자들과 특정 집단을 작은 ‘표본’ 혹은 하나의 ‘모델’로 설정하여 미리 통일한국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이 모델을 통하여 발생하는 문제점을 정부와 민간이 참조하고 보완한다. 마지막으로 통일한국 즉, 두 체제를 융합 발전시킬 수 있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6.15 선언에서의 제 2항이나 혹은 경제협력 등은 예외로 하고 주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약술한 draft 이다.
논어는 20편으로 다음과 같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로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 ‘학이’ 편이다. 일주일에 약 1장 정도를 익히면 일 년이면 팔일편까지 마칠 수 있겠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그거 읽어서 돈 되겠나? 읽기만해서는 돈이 안 된다. 읽고 사색해야한다. 그러고는 삶에 적용해야 한다. 충분히 돈이 되고 고품격의 삶을 살 수 있다. 아파트 평수가 넓고 자동차 배기량 큰 게 품격과 행복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독으로라도 한번 읽어보라.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읽도록 하라.
총 20편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학이 16장
위정 24장
팔일 26장
이인 26장
공야장 27장
옹야 28장
술이 37장
태백 21장
자한 30장
향당 17장
선진 25장
안연 24장
자로 30장
헌문 47장
위공령 41장
계씨 14장
양화 26장
미자 11장
자장 25장
요왈 3장
논어 ; 학이 ; 제1장
▣ 제1장(第一章)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열) 乎아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공자께서는 이렇게 강조했지만 대한민국의 대수의 사람들은 공부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초중고 청소년들을 보자. 그들이 공부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다. 세칭 대한민국의 최고의 고등학교라는 서울의 D 외고 경기도의 Y 외고 등에서 하는 공부는 주로 ‘선행학습’이다. 즉 2학년에 할 것을 1학년에 하는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출문제를 풀고 모의고사를 잘 본 후에 자신의 점수로 어느 정도의 대학에 갈 수 있는지 혹은 수시가 유리한지 정시가 유리한지를 가늠한다.
그렇게 와신상담하여 대학에 가면 어떠한가? 역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게 여기겠는가? 대학 역시 기쁘게 여길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취업이이라는 게 대학 입시보다 더 어려운 관문이 되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보다 더 빡센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래서 소위 스펙을 쌓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어른, 기성세대들은 어떤가? 공부를 하는가? 혹시 기뻐하는가? 내가 볼 땐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먹고 살기에 바쁘다는게다. 일년 책 한 번권도 안 읽는 국민이 상당수라는 게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만 공부를 함으로써 그 문제에 대한 분석과 전략을 세울 수 있고 더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또 삶의 지혜를 높이게 된다. 오늘의 현실은 어른이 되면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공부는 어느 정도의 삶의 내공이 쌓였을 때 하는 게 어린 시절 보다 훨씬 이해가 빠르고 재미가 있다. 그리고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빨리 알게 된다.
물론 아주 옛날에는 공부하는 것이 쉬웠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또 노는 게 엄청 재미있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공자는 더 잘 알았을 것이다. 노는 게 재미있다. 하지만 어떻게 노는 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학(學)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모두 선(善)하나 이것을 앎에는 먼저 하고 뒤에 함이 있으니, 뒤에 깨닫는 자는 반드시 선각자(先覺者)의 하는 바를 본받아야 선(善)을 밝게 알아서 그 본초(本初)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습(習)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마치 새 새끼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열(說)은 기뻐하는 뜻이다. 이미 배우고 또 때때로 그것을 익힌다면 배운 것이 익숙해져서 중심(中心)에 희설(喜說)을 느껴 그 진전이 자연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습(習)은 중습(重習)[거듭함] 이나, 때로 다시 생각하고 연역(演繹)해서 가슴속에 무젖게 하면 기뻐지는 것이다.”
또 말씀하였다. “배우는 것은 장차 그것을 행하려고 해서이니, 때로 익힌다면 배운 것이 내 몸에 있다. 그러므로 기뻐지는 것이다.”
사씨(謝氏)가 말하였다. “시습(時習)이란 때마다 익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앉음에 시동(尸童)과 같이 함은 앉아 있을 때의 익힘이요, 섬에 제계(齊戒)함과 같이 함은 서 있을 때의 익힘이다.”
有朋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동지(同志)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내 어릴 적 만해도 이웃 마을 친척집에 가는 것이 즐겁고, 명절에 친지가 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설과 추석에 부모 형제 일가친지가 서로 만나기 힘든 세상이다.
윤씨(尹氏)가 말하였다. “학문(學問)은 자신에게 달려 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서운해 할 것이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비록 남에게 미치는 것을 즐거워하나 옳다함을 받지 못하더라도 서운함이 없어야 이것이 이른바 군자(君子)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건대, “남에게까지 미쳐서 즐거운 것은 순(順)이어서 쉽고, 알아주지 않는데도 서운해하지 않는 것은 역(逆)이어서 어렵다. 그러므로 오직 덕(德)을 이룬 군자(君子)만이 능한 것이다. 그러나 덕(德)이 이루어지는 소이(所以)는 또한 학문이 올 바라야 하고, 익히기를 익숙히 하고, 기뻐하기를 깊이 하여 그치지 않음에 말미암을 뿐이다.”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낙(樂)은 열(說)을 말미암은 뒤에야 얻어지는 것이니, 낙(樂)이 아니라면 군자(君子)라고 말할 수 없다.”
김구 백범 선생은 1876년생이다. 그의 나이 17세 되던 1892년, 황해도 해주에서 경과(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살사하는 과거) 가 있었다. 백범이 이 과거 시험을 치기로 마음먹고 준비에 들어간다. 백범과 그의 부친은 과거 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만 정선생이라는 분의 도움으로 시험 준비를 그런대로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험 당일 과거장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과거장은 원래 수험생이외는 들어 갈 수가 없는데 특히 조선후기에 문란해져 여러 사람이 들어가는 폐해가 생긴 것이다. 또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난리였다. 초시를 보려고 乞科(걸과)하는 모습은 그마나 보아 넘길 만 했으나, 대작 대필을 하는 경우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사정이 그 지경에 이르자, 백범은 걸과 즉 노인들이 시관(시험감독관) 에게 한번만 응시하게 해달라는 광경을 보고서 결국 과거 답안지에 아버지 아름을 쓰고 자기는 나중에 응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통인(일종의 사환)하는 자들이 시험답안지를 감독관에게 보이지도 않고 도적질을 해가고 남의 글을 보고서 자기의 글로 제출 하는 사람, 게다가 돈을 주고 합격하기도하고 大臣(대신)에게 빽을 써서 합격하기도 한다.
심지어 감독관의 수청 기생에게 주단을 몇 필 주고 합격하는 이도 있었다. 결국 백범은 이러한 과거 시험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다른 공부와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다.
김구선생보다 과거 시험보다 더 흥미로운 역사를 나는 보았다. 그가 바로 연암 박지원의 과거시험에 관한 일이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서 답안지에 바위와 고목만을 그리고 나온 것이 바로 연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를 보러 가서 답안지에 그림을 그리고 나온다고 생각해보라.상상초자 할 수 없는 일이고, 당장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그 후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정철조, 백동수 등 장안의 괴짜와 걸출들과 어울리며 젊은 시절을 보내는데 그들이 바로 북학파의 한 줄기이기도 하다.
연암은 연유가 있겠으나 과거시험을 스스로 포기하고 당시 양반사회와 사회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는 격식을 싫어하는 일종의 자유인으로 살면서 고관대작들을 냉소하며 풍류와 유람으로 세상을 산 것 일테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조롱이고 부조리와 악습을 혁파하려는 것이 아닐 런지 싶다.
나는 연암이 과거시험장에서 답안지에 나무와 바위를 그려 놓고 나오는 대목을 읽고 파안대소 했다, 나는 왜 그런 배짱이 왜 없는가? 통일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이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것 보다 더 힘들고 고독하다. 때로는 마치 외과 수술과 같은 고통이 만신을 짓누르는 것 같다. ‘천국보다 낯선’ 이라는 영화를 볼 때 느꼈던 지루함보다 더 지루하다. 결국 내가, 내 삶이 참으로 경박할 뿐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매미는 여름밖에 모른다고 하였다. 내가 매미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매미는 봄도, 가을도, 겨울도 모르고 오직 한 철 여름만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미는 단 한 철만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알기에 그렇게 울어 대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때로는 매미처럼 지독하게 울어야 한다. 울지 않는 매미는 없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연암 선생은 우는 것이 웃는 것이라 했다. 아기가 어미 뱃속에서 나와 우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고 양수에 열 달 동안 갇혔다가 해방되는 기쁨의 소리이니 그것은 울음이 아닌 바로 웃음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매미도 우는 게 아니라 웃는 것이고 노래하는 것일테다.
내가 외롭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그러하다.또 내가 외롭다는 것은 결국 칠정과 상통하고 서로 연결된다. (喜,怒,哀懼,愛,惡,欲) 기쁨과 슬픔이 그러하고 사랑과 미움도 그러하다. 매미가 한 여름에 웃듯이,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 웃듯이 나도 우리도 호탕하게 웃으며 걸어가리라.
대개 사람을 평가할 때, 어느 대학 출신인가를 보게 된다. 나도 그리 심한 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대학 간판을 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 와서는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에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글을 잘 쓰는 가로 바꾼 것이다.
이른바 S대학을 나와도 글 쓰는 것을 보면 시쳇말로 '개판오분전'인 사람이 상당수다. 심지어는 민망할 정도인 사람도 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대학을 졸업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글이 소설가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말은 지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글을 그 사람의 지식수준을 보여준다. 따라서 글로써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별로 무리가 아니다. 또 글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가의 척도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글을 잘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 쓰려고 노력은 한다. 글쓰기에 관한 책울 약 20권을 읽었고 일주일에 책 두 권 정도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짧지만 하루에 한편이라도 글을 쓰려고 한다. 그래야 글을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들을 평가할 때도 민사고인가, 혹은 대원외고인가로 보지 않는다. 학교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글을 먼저 본다. 토론 대회에 나온 대상 수상자들의 글을 보면 글의 내용이 장난이 아닌 경우가 많다. 언젠가 글이 이게 뭐냐고 조금 나무랐더니 그 친구 왈, “내가 작가가 될 것도 아닌데요. 뭘!”
통일교육문화원은 통일을 주제로 토론과 논술 대회를 11번이나 개최했다. 이번 대회부터는 글쓰기 능력을 예년보다 높게 평가하기로 했다. 글쓰기가 제대로 된 후에 토론을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간혹 토론만 잘하면 되지 라는 생각과, 토론을 말 잘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도 이참에 환기시키고자 한다. 통일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논리적인 글을 쓴 후에 상호 토론을 하는 게 순리이다.
통일교육문화원은 청소년들에게 글쓰기 능력을 우선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토론인데 토론 역시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과 상대를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언급했듯이 작가만이 글을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회에 진출하여 어떤 직업을 갖든 글쓰기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글을 읽고 글쓰기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우리가 왜 글을 잘 써야 하는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하버드대학의 교육목표는 세계적인 리더를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국의 대통령부터 정치, 외교, 행정, 비즈니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하버드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하버드대학이 하버드 출신을 배출하면서 가장 신경쓰는 분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글쓰기’입니다. 작가양성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졸업생을 모두 언론사 기자를 만들 것도 아니면서, 왜 글쓰기과목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도 안 시켜주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이 명문대학이 목표로 하는 세계적인 리더의 양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이 글쓰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렇게 철저히 글쓰기교육을 시키는 학교이기 때문에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 대학 교육대학원의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 교수는 『하버드 수재 1,600명의 공부법』에서
"하버드생들이 4년 동안 가장 신경쓰는 분야가 바로 글쓰기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은 대학생활은 물론 직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다."라고 강조합니다.
하버드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글쓰기 프로그램을 갖고 있습니다. 1872년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익스포스(Expos)'라고 부르는데, 바로 논증적 글쓰기 프로그램(Expository Writing Program)입니다. 그들이 '하버드의 전통' 이라고 자랑하는 이 프로그램은 하버드에 입학하면 누구나 한 학기를 수강해야 하는 과목입니다.
프로그램이 녹록치 않습니다. 굉장히 '빡셉'니다. 익스포스10, 익스포스20, 익스포스52 등 세 단계가 있는데, 여러 편의 논문을 써야 하는 것은 기본이지요. 논증전개 방법, 근거자료를 종합하고 인용하는 방법, 표절을 피하는 방법, 문장이나 단락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방법, 문체론 등을 배웁니다. 문장유형, 메타포, 리듬, 아이러니, 역동성 등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베이컨, 에머슨, 디킨슨, 로렌스, 오웰 등의 작품 문체에 대해 토론도 합니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이 프로그램의 교수진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입니다. 모두 40여 명인데, 이들 가운데 전공이 영국 문학이거나 미국 문학인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철학, 미국 역사, 유럽 역사, 환경, 문화인류학, 러시아 문학, 사회학, 대중문화, 시각문화, 공연, 음악, 생리학 등 전공도 관심분야도 가지가지입니다. 켈트문학을 전공하고 가수와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글쓰기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백그라운드를 가진 교수진이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글쓰기 테크닉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전개과정을 가르친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영문학과 교수가 어떻게 천체과학에 대한 글쓰기를 지도하겠습니까? 글쓰기 자체를 이미 문학에서 완전히 떼어내 오히려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으로 옮겨놓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글쓰기 가이드책자도 종류가 가지가지입니다. 심리학 관련 글쓰기, 종교학 관련 글쓰기, 동아시아 연구에 대한 글쓰기, 생명공학에 대한 글쓰기, 철학에 관한 글쓰기, 음악에 대한 글쓰기 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공학에 대한 글쓰기 가이드를 보면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글쓰기는 다른 과학자들은 물론 과학에 대한 아이디어와 과학적 발견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과학을 연구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실험노트를 작성하고, 연구제안서를 쓰고, 연구논문 형태로 스토리를 얘기하는 것 모두가 과학적 사고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래서 이 가이드책자에는 실험노트, 연구제안서, 연구논문, 과학논문에 대한 비판과 대중을 위한 글쓰기 등에 대한 상세한 방법론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익스포스의 이 '생명공학 글쓰기강좌' 가 두 가지 접근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는 글쓰기를 통해 과학적 사고를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 또 하나는 과학을 통해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좌는 자신의 과학전공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익스포스에 들고 와서 글쓰기를 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한마디로 글쓰기 커리큘럼과 과학 커리큘럼이 통합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야 훌륭한 작가이자 훌륭한 과학자를 배출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하버드는 익스포스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글쓰기와 사고력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훌륭한 사고력은 훌륭한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하버드대학뿐만 아닙니다. 경제계의 리더를 육성하는 비즈니스 스쿨도 마찬가지입니다. 와튼스쿨은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교육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학생이 '글쓰기세미나'를 수강해야 합니다. 비판적인 사고와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와튼스쿨은 비즈니스 교육을 예술, 과학 교육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또 인디애나대학 켈리스쿨은, 글쓰기만 따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업에서 글쓰기, 말하기, 듣기, 팀워크를 통합시킨다고 합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는 이 대학의 스밀(Smeal) 비즈니스스쿨의 글쓰기 모듈을 전학생이 수강해야 합니다. 리치먼드대학의 한 회계학 교수는 자신의 중급회계학 수업에서 비즈니스와 관련없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에 대해 페이퍼를 쓰라는 숙제를 낸다고 합니다.
미국의 기업들도 글쓰기능력을 우선순위에 두고 인재를 뽑고 있습니다. 글쓰기 능력은 비즈니스 전공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베스트뱅크, 컨설팅회사뿐 아니라 테크놀로지회사까지 리쿠르팅 기준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온 나라가 글쓰기에 목숨 건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습니다. 스스로 리더국가로 자부하는 미국인 만큼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입-대학교-입사-직장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큰 굽이마다 글쓰기능력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교육됩니다. 대입전형에서는 학업성적 외에 SAT, 과외활동 및 수상경력, 추천서, 면접 그리고 에세이 등을 요구합니다. 이 가운데 에세이는 단독항목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SAT 내 과목으로도 지정돼 있습니다. 글쓰기로 대학가고 글쓰기로 취직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닙니다.
2007년 '미국대학설명회'를 위해 한국에 온 하버드대 낸시 소머스 교수는 국내 한 주간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습니다. 소머스박사는 익스포스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버드는 사회에서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익스포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단순한 학습효과를 뛰어넘어, 능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지난 사회인으로서의 덕목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다. 생각을 탄생시키는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학문적인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분야에 꼭 필요한 과제다."
정리하면, 공부를 잘 시키기 위해서 뿐 아니라 능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그렇게 모질게 글쓰기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재양성이나 리더교육을 위해 왜 글쓰기가 이렇게 중요한 걸까요? 보다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보다 합리적인 사고의 정리를 위해 글쓰기보다 더 유효한 수단은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고, 글로써 보다 명료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보다 선명한 '소통'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위로 납작 짓눌리지 않고 세대구분 없이 원활하게 '소통'하고, 자기 삶의 키를 스스로 쥐고 살아가며, 나아가 어떤 분야에서든 리더가 되려면 이렇듯 글쓰기능력이 필수적입니다.
목사를 흔히 영적 지도자라고 한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도자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 지도자는 아니다. 교회 뿐 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든지 마찬가지다. 이것은 부적격자가 그 만큼 많다는 것이다. ‘목사 지도자론’ 은 일단 차치하고 여기에서는 논할 게 따로 있는데, 맨 마지막 부분에서 논하고자 한다.
그제 L 목사님을 만났다. 오늘날 목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목사의 역할’을 짧은 시간에 구체적으로 말하기엔 무리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 진보했고,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만난 L 목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 역할이 오늘의 현실에 더 적합하다고 했다.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일리가 있는 얘기다.
또 한 가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목사가 성경 외에 인문 사회 과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야 하는가이다. 개인적으로 목사는 인문 사회 과학에 밝아야 하고, 그것은 결국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 성경만 읽고 기도만하는 시대는 더욱 아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는데 이것도 기실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는 게 아닌가. 성령 충만을 기적이 나타나고 영안이 열려 신과 직통으로 대화하는 것으로만 보면 곤란하다.
이쯤에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선의 최고 성군 세종은 신하보다 자신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기에 대신들 역시 백성보다 자신들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본론이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게 첫째 덕목이다.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수능을 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 보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오늘날의 위기는 다름이 아닌 바로 지도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천박한 의식에 사로잡히고 윤리마저 무너져버린 자본주의에 매몰된 것이다.
국회의원이니 장차관이니, 교수 박사 등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 적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아예 공부하고는 담을 쌓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해도 그 자리가 보전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른바 자기의 일에 대해 내공이 있을 리 만무하고 사회는 더욱 경박해지는 것이다. 사회 지도자가 이 모양이니 일반 국민들을 오죽하겠는가.
10대 고등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게 아니라, 지도자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비로소 나라가 제대로 서게 된다. 부적격자를 자연스럽게 도태시키고 실력 있는 적격자가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종이 왕이 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이 얼마나 세상을 괴롭게 하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항상 공부하고 실력을 키우고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도자이고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자이다. 오늘 날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고 이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
원평 김기환
참고로 여기에 종교와 분야를 초월하여 목사가 주역을 강의한 책이 있어 이참에 소개하고자 한다.
"주역실의"의 저자 이치문목사의 주역강의
▲ 저자 이치문 목사
주역(周易)은 무슨 신비한 책이 아니다. 먼 옛날 성현(聖賢)들이 자연현상을 보고 세상과 삶의 이치를 생각하여 정리해 낸 지혜서이다. 주역이 부호와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혼란을 야기(惹起)하고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이 건이이지곤이간능(乾以易知坤以簡能) 즉, “하늘의 이치는 간이(簡易)하여 알기 쉽고, 땅의 이치는 간단(簡單)하여 좇기 쉽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수 있듯이 주역은 매우 알기 쉬운 경전이다.
임금에게는 밝은 정치, 정의로운 사회, 백성에게는 반듯한 삶을 위한 지혜서요 철학책이다. 주역은 임금이나 백성들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몽학(蒙學) 선생이다. 누구나 주역이 말하고 있는 바를 실천한다면 변화를 일으켜 복을 얻는다는 것이 주역(周易)의 역(易)이 가지고 있는 뜻이며, 의도하는 목적이다. 주역은 세상과 삶의 이치로만 보면 가히 성경과 견줄만한 지혜서이다.
그러면 왜 공자(孔子) 같은 성인(聖人)이 단박에 깨치지 못하고 위편삼절(韋編三絶) 즉, 책을 꿰어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으며, 그러고도 이해를 하지 못하여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생명을 더 연장해주어 내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주역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게 된다면 나의 인생에 큰 허물이 없으리라.(子曰加我數年五十以學易可以無大過矣, 論語述而)”고 고백하였으며, 수천 명의 대가들이 주역을 주석(註釋)했는데, 그 주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역림삼천(易林三千)이라는 말이 생겨났는가? 더욱이 동양 제일의 고전이요, 지혜(智慧)의 보고(寶庫)인 주역이 어찌하여 몽상(夢想)이 난무하는 점서(占書)가 되었는가? 그 이유는,
첫째, 그동안 괘 이름을 잘못 읽고 있었다. 부호로 이루어진 64괘의 이름은 아래의 부호로부터 위의 부호로 읽어야 한다. 맨 아래의 효를 초효(初爻)라 하고, 맨 위의 효를 상효(上爻)라 부르는 것과 같이, 아래 소성괘에서 위의 소성괘로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제7괘 지수사(地水師)는 수지사로, 제15괘 지산겸(地山謙)은 산지겸으로, 제33괘 천산돈(天山遯)은 산천돈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괘의 정확한 의미를 알수 있다. 주어가 바뀌면 그 의미는 천지차이다.
水地師 물은 땅을 정복하는 군대다. 물이 땅위를 흘러가는 것이 마치 군대가 대오를 지어 적진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연상하게 한다. 군자는 땅을 정복하는 듯이 일사분란하게 대오를 지어 흘러가는 물을 보고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즉, 단체에는 대오(隊伍) 곧, 규율이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山地謙 산은 땅보다 높지만 땅에 겸손하다. 군자는 산이 높지만 땅에 겸손한 것을 보고 배움이 있어야 한다. 즉, 겸손한 자세로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山天遯 산이 하늘아래 숨는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과 그 키를 경쟁할 수 없다. 하늘과 다투지 않고 물러나 숨는다. 군자는 이를 보고 나가고 물러감을 배워야 한다. 즉, 강한 자와 다투지 말아야 한다.
둘째, 자연현상의 조화를 뜻하는 괘를 이해하지 못했다. 64개로 나눈 자연현상 각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말하고자 하는 핵심주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제10괘 택천리(澤天履)는 “비구름이 하늘을 밟고 서 있다. 즉, 비구름에 물이 가득 차 있어(풍부하여, 이미 충분히 부자다), 곧 비가 내릴 것이다(베풀다. 남을 돕다)”로 해석해야 한다. 이에서 리(履)괘의 핵심주제는 “가진 자는 베풀어라”이다. 그러므로 卦辭 履虎尾不咥人亨은 “호랑이도 베풀면 은혜를 갚는다”로 새겨야 한다.
제29괘 감위수(坎爲水)는 아래도 물 위도 물, 물속에 잠겨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물은 재물 곧, 돈을 뜻하므로 감(坎)괘의 핵심주제는 “돈 돈 하면서 돈 속에 파묻혀 살지 말라” 즉,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이다. 이에서 初六 習坎入于坎窞凶은 “돈을 너무 헤프게 써 마지막 남은 재산(坎窞)까지 다 탕진하는구나. 흉하도다.”로 해석해야 한다. 제56괘 산화려(山火旅)는 “산이 불을 여행시켜준다” 즉 “산의 나무를 땔감으로 이용해 산불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여행 한다”라는 뜻에서 려(旅)괘의 핵심주제는 “남의 희생 위에 내 이익을 취하지 말라”이다.
제59괘 수풍환(水風渙)은 물이 바람을 이용해 흩어지는 것과 같이 무엇인가를 지렛대로 이용하라는 괘다. 이에서 九二 환분기궤회망(渙奔其机悔亡)은 “도마를 부지런히 물로 씻으면 후회가 없으리라”로 해석해야 한다. 즉, 고기를 잘라 파는 도마를 깨끗이 하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업환경을 청결히 하여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렛대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3,000여 년 전에도 클린 사업장 개념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渙 물 출렁출렁할 환, 물 흘러 흩어질 환, 机는 도마를 뜻한다. 机上肉 도마위의 고기, 机上肉不畏刀 도마위의 고기가 칼을 두려워하랴! 이미 죽은 목숨인데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
주역실의 590쪽 양장 36,000
원앤드원북스 (T 017-701-7327) 프리존뉴스 백종원 기자 (jwbaek8390@empal.com)
허균은 자신이 사는 집의 이름을 사우재(四友齋)라고 하였다. 그것은 벗과 자신을 합하면 모두 넷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벗이란 허균이 살아생전에 이미 사라진 옛 선비들이다.
첫째는 진나라 처사 도연명이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그는 한가롭고 고요하며 작은 일에 대범하여 항상 마음이 편안했으니,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편히 여기고 천명을 즐기다가 죽었다. 그의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히 높아 잡을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연명을 깊이 흠모만 할 뿐, 그 경지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은 당나라 한림 이태백인데 그를 좋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뛰어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 여기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귀인들을 개미 보듯 하며 스스로 자연 속에서 방랑했다" 그런 그가 부러워 따라 배우려고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송나라 학사 소동파이다. 소동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이나 천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더불어 즐기니, 유하 혜가 자기의 덕을 감추고 세속을 좇는 풍모와 같은 데가 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으로 벗을 삼고 굳이 속인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여겼다.
나는 허균의 경지에는 티끌만치도 따라 갈 수 없어 다음과 같은 벗을 두었다. 첫째는 동서양의 고전을 벗으로 하였다. 고전의 매력을 사람으로 치면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의 윙크보다 진하기 때문이고 우리나라의 경광 중에는 보름달이 뜬 해운대 바다보다 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글을 쓰는 게 나에는 큰 벗이다. 글을 쓰는 것은 말과 같이 날아가지도 않고 그대로 남게 될 뿐 아니라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수 있어 어떤 벗과의 친함보다 비할 길이 없다.
셋째는 내가 연주하는 기타Guitar 다. 기타로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때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의 심안이 평온함은 물론 온 사물이 다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축구)공이다. 공이 하나있으면 땀을 흘릴 수 있어 운동으로 적당하다. 그리고 공은 항상 둥글어 모나지 않아 어디로든지 잘 굴러간다. 이 네 가지가 나의 벗이다.
그런데 아직 내 집 이름을 짓지 못했다. 고향 이름을 따서 심포서원이라 했는데 서원이라는 게 너무 흔해 온전히 정하지는 않았다. 또 인터넷 블로그에 지을까 시골 농가를 하나 구입할까 이것도 생각 중이다.
내가 이들과 벗하는 이유는 통일문제와 동북아 국제관계를 공부하면서 약간의 문약에 빠진 것 때문이고 학문을 학문답게 하지 못했기에 이제는 고전을 탐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 박사라는 것이 해외에서나 국내에서나 학문적인 내공이 다소 부족한 것을 서로가 잘 아는 바이니 이것은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공부하지 못한 것이 그 연유라 하겠다. 내가 요즘 고전 읽기에 몰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 연말이라 이런 저런 일들로 나름 분주하다. 저녁에 신문을 읽는데 올 여름 경기도 화성 수련원에서 만난 김영호 총장의 글을 읽었다. 그 글에 '좀비'라 용어가 나오길래 문득 생각이 떠 올라 몇 자 적어 본다.
'좀비'라는 말이 있다.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특정 종교에서 사용되고, 컴퓨터 용어로도 사용되고 기업에서도 사용된다. 대개 부정정인 뜻으로 사용된다. 종교적으로는, 영혼을 빼앗기고 이성이 마비된 인간으로 사용되고, 컴퓨터에서는 시스템의 자원으로 점유는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프로세스를 일컫는다. 기업에서는 조직 뒤에 숨으려 하거나 적극적이지 못하고 생각이 고루한 사람을 지칭하는 신조어다. 영화에서는 주로 죽은 시체가 살아서 돌아다니는 끔찍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나온다.
내가 생각하는 좀비는 간단하다. 영혼 또는 정신이 무엇인가에 빼앗겨 이성적인 판단이 잘 안 되고, 지성이 거의 마비된 사람들이 좀비다. 이런 사람이 건전한 비판을 할리 만무하다. 유감인 것은, 정작 비판을 해야 할 때는 하지 않고 비판하지 말거나 비판하지 않아도 될것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비판의 대상인줄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에 세뇌당한 사람은 그래도 비판하는 능력은 있다. 세뇌당하지도 않았는데 비판 능력이 없는 사람도 크게는 좀비의 범주에 들어 간다.
우리는 어떤 때에 분노하는가? 그것은 불의한 경우에 분노한다. 문제는 힘 있는 자가 불의할 때는 침묵하고 강아지 정도가 불의할 때는 발로 찬다는 것이다. 군주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군사독재자들이, 그 아류들이 불의한 것에는 침묵한다. 아니 좀비들처럼 이성과 지성이 마비되어 인식 자체가 없어 보인다.
역사를 보건대 포악한 군주가 학정을 해도 순종하며 침묵했고, 일제식민지 시대에 오히려 일제에 충성하고 조선인을 더 악랄하게 탄압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군사 독재가 탱크로 학교를 점령하고, 신문을 폐간시키고, 국회를 해산해도 피한하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을 잡아 고문을 하는 불의를 자행해도 분노하기는 커녕 오히려 동조하였고 심지어 그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불의에 맞서 비판하면 빨갱이가 되기도 했다.
죽은 시체가 살아서 돌아다니는 영화속의 좀비와 우리가 사는 사회가 크게 다를 바 없다. 분노할 때 분노하는 건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다. 분노할 때 분노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분노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할까. 신좀비라고 불러야 할까?
ps 우리나라가 13위의 경제대국이고, 교육열도 높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뤘다. 그렇지만 그야말로 풍요속의 빈곤이고 속빈 강정이고 한탕주의가 판을 친다. 게다가 여러가지 갈등과 대립으로 난리이고 나라는 65년 동안 분단되어 요즘은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다. 한마디로 세상 참 요지경이다. 나를 포함한 좀비들, 자기도 모르는 자발적 노예근성을 가진 자들을 이런말에 한 번쯤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세상이 밝아지기 때문이다. 이참에 나는 이 세상을 밝게 하는 데 장애물은 아닌지 자문해 보자.
ppss 권력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탐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이해타산을 쫒아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는 자. 게다가 이런 자가 남을 단죄하며 오만하고 세도까지 부린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봐야 하는 가?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제법 많아서 추신으로 남긴다. '선악이 개오사'(善惡 皆吾師) 란 말이 있는데 오늘도 세상 공부 참 많이 한 날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다.
무상급식이 논란인 가운데 어린왕자가 우리에게 왔다. 어린왕자는 무상급식이 무언지도 모른 채 어른들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어느 날 귀를 쫑긋 세우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보았다. “무상급식은 포풀리즘이다. 아니다 교육기본권에 속한다. 무상급식을 할래도 돈이 없다. 그렇지 않다. 다른 예산을 아끼면 되고 시.도에서 지원도 해준다. 전면적인 실시는 안 된다. 아니다 가능한 전면적으로 실시해야한다. 친환경 급식으로 제대로 하자. 아니다 이미 기존 체계 안에서도 충분하다.” 어린 왕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가 쓴 소설 ‘어린왕자’를 떠올리며 우리 사회의 무상급식 논란을 비유하고 상상해 보았다. 소설 어린왕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 묻지 않는다. 그 얘는 꿈이 뭐니? 목소리는 어때? 그 앤 어떤 꽃을 좋아하고 어떤 놀이는 좋아해? 라고는 묻는 법이 없다. 어른들은 주로 이렇게 말한다.
그 얘 공부 잘해?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어? 우리 보다 잘 살아? 라고 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름다움은 모르고 돈밖에 모른다.
어린 왕자는 결코 돈이나 아파트 크기가 아니라 밤 하늘 별을 따고 아름다운 꽃을 가꾸려 한다. 어린왕자는 또 말한다. 장미빗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봤어요. 창가에는 제라늄 꽃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어요. 라고 말하면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조차 못한다. 그래서 그 집 10억이래요. 라고 말하면 아 그래? 정말 좋은 집이구나라고 어른들은 금방 알아듣는다.
어른들은 돈이 최고이고 언제나 바쁘며 자신을 최고로 안다. 그리고 우리 어린왕자들의 생각보다는 항상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려 한다. 우리는 늘 즐겁지만 어른들은 늘 뭔가에 쫒기고 왠지 불안하다.
그건 그런다 치고 어른들은 또 너무 따지기를 좋아한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포풀리즘을 잘 모른다. 그것이 어떤 꽃 이름인줄로 안다. 그런 알 수 없는 무서운 이름 보다는 학교 점심 시간 복도에 줄을 오래 동안 서서 기다리려야 하는 어려움을 알아주기 원한다.
어린왕자는 자신이 먹는 점심밥 한끼에 예산이 얼마 들어가는 지를 잘 모른다. 점심 시간에 덩치 큰 형들이 밤 남기지 말라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 무서워 억지로 다 해치워야 하는 게 힘이 든다. 어린왕자들은 그걸 알아주길 원한다.
가끔 어린왕자가 싫어하는 시래기국이나 크게 자른 김치 깍두기가 나오면 점심 시간이 얼마나 괴로운지 어른들은 잘 모른다. 어린왕자는 무상급식이 전면실시든, 단계적 실시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엄마 아빠들이 자주 학교에 와서 같이 점심을 먹기를 원한다.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 어른들은 잘 모른다.
친환경 급식에만 신경을 쓰는 어른들은 우리 어린왕자들이 무엇을 가장 먹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어른들은 바람을 무서워하는 꽃에게 바람막이가 될 줄은 모르고 돈과 포풀리즘과 친환경과 전면급식과 단계적 급식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것에 색깔을 칠하는 것을 즐긴다.
어린왕자는 곧 어른이 된다. 그러면 어른 왕을 뽑는 투표를 하게 된다. 그 때 어린왕자들은 자기와 같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어른 왕을 뽑을 것이다. 양 한 마리 그림을 그려 줄 수 있는 그런 어른 중에서 한 명을 뽑을 것이다.
김교신 선생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한학을 열심히 공부하였고 함흥보통학교와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 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1922년에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지리·박물과로 전과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도쿄 유학 당시 일본의 국군주의에 반대하고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를 주창하던 그리스도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에서 성서 교육을 받았고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양정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는데 손기정이 대표적인 제자다. 그리고 송두용, 유석동,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과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하여 소위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였다.
나는 평소 김교신의 사상이 어떠한 것인지 궁굼했다. ‘무교회주의자’라고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어느 날 김교신 전집을 발견하고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7권 중 3권만 읽고 중단했다.
단순히 김교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무교회주의라는 테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서적과 주변 학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교신을 알기 전에 우찌무라 간조에 대해서 알아야 했고, 우찌무라간조를 따라가면 루터와 칼빈에 대해 알아야 했고, 그것을 따라가면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귀중한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었다.
생각한 끝에 김교신에 대해서는 그가 강조한 핵심적인 내용만 알고 자세한 것은 또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다. 김교신은 우선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찌무라 선생의 영향탓이다. 세상의 어떤 책보다 성서가 최고이고 제일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글래스톤 옹의 예를 든다. 그는 80세를 넘게 살면서 약 1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60년 동안 일 년에 166권을 읽어야 만권이 된다. 대단한 독서량이다. 우리가 읽은 책이 천권이나 될까?
칼라힐이 영국과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는 얘기, 단테의 신곡은 몽블랑보다 크고,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지중해보다 높고, 아무렐리스의 명상록은 남아연방을 덮고, 마호메트의 코란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고, 석가의 팔만대장경은 인도양은 가리고 공자의 논어는 곤륜산맥을 덮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책들을 읽거나 많은 양의 책을 읽는 것 보다는 오직 한권이 최고의 책인데 그것이 바로 ‘성서’라는 것이다.
두 번째 김교신은 기성교회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성서조선 창간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도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는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라.” 고 적고 있다.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매우 단호한 입장이다.
세 번째는 성서연구이다. 그는 성서연구를 중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성서연구회’다. 그리고 월간으로 성서조선을 발행했다. 이 또한 우찌무라의 영향이 크다. 우찌무라가 강조하는 것 중에 설교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설교가 바로 성서이고 읽는 이가 교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김교신 역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고 성서조선 출간에 생애를 바쳤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김치 맛나고 조선 혼을 가진 기독교를 꿈꾸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당시가 일제 식민지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미국선교사들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김교신 선생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내가 평소 알고 있던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선생이 왠지 모르게 혁명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론은 그는 또 다른 형태의 복음주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달갑지는 않지만,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진 지도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핵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1956년 소련과의 '핵에너지 평화 이용 협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북한은 자국 인재를 모스크바로 유학 보내 핵물리학을 배우게 하고, 이후로는 김책공대 등에서 핵과학자를 양성하였다. 1960년대 소련의 도움으로 연구용 핵반응로를 건설하는 정도였는데, 1970년대에는 자체 기술로 핵반응로를 건설하여 운전하였다. 1985년부터는 영변에 '사용 후 핵연료 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을 만들고, 핵 관련 연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하듯이 대체로 핵개발 과정은 여타 국가들도 유사한 경로를 밟는다. 또한 이것은 대개 기존 핵보유국의 기술을 통해 암암리에 핵개발을 추진한다.
중국 베이징에서의 6자회담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1993년 무렵이다. 1990년 냉전 체제가 막을 내리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구소련 지역인 우크라이나 등지의 핵이 제3국으로 유출될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IAEA는 북한의 영변 지역 핵 시설에 대해 특별 사찰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사찰 방법을 두고 반발했으며, 결국 NPT 탈퇴를 선언하고, 미국은 핵 의심 시설에 대해 한때 군사적 공격을 검토한 바 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가까스로 사태의 고비를 넘기고 1994년 비로소 '제네바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북핵 위기의 대체적인 전말이다.
제 2차 북핵 위기는 2001년 부시 정부가 들어서자 충격적인 9·11 사태가 발생하였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까지 터졌다. 당시 부시 정부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네오콘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대북 강경책을 펴게 된다. 북한은 탈냉전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큰 타격을 받은 데다 9·11 테러로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이 본격화되자 체제 붕괴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1994년 체결한 제네바합의도 지지부진하고 KEDO 집행이사회가 중유 공급을 중단하는 등 압박이 거세지자 다시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것이 제2차 북핵 위기의 대략이다.
북한의 핵카드 게임은 미국과 남한에 대한 압박과 대화라는 양면을 모두 활용하였다. 그러나 2006년 5월과 7월에는 강한 공격모드로 미사일 시험 발사와 핵실험을 감행하였고, 올해 2차 핵실험과 위성 로켓까지 발사한 상태이다. 이러한 일련의 북한 핵과 관련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대화가 바로 '6자회담'이고, 2003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최초로 개최되었다. 지난주가 6자회담에서 '9·19 공동 성명'이 채택된 지 4주년이다. 하지만 9·19 공동 성명은 국내외적으로 홀대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면당하고 있다. 9·19 공동 성명은 남북을 포함하여 주변 4대 강국이 한반도의 통일과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을 위해 합의한 역사적인 문서이다. '북한은 핵을 폐기하고 미국은 북한을 침공하지 않는다. 북한과 미국은 관계를 정상화하고, 일본과도 관계 정상화를 이룬다. 6자는 에너지, 교역 투자 분야를 비롯한 경제 협력에 합의하고, 동북아시아의 항구적 평화 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것이 BDA 문제라는 복병을 한때 만나기도 했으나 가까스로 해결하고 9·19 공동 성명에 이어 이를 이행하기 위한 초기 조치라는 명칭의 소위 2·13 합의가 2007년 2월 13일에 채택되었다. 이 합의는 9·19 공동 성명을 좀 더 구체화한 것으로, '행동 대 행동'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그리고 통일에 대해 단계적이고 보다 명확한 로드맵을 제시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중요한 합의가 현재 핵사찰 방법에 대한 시비와 각자가 처한 국내외의 정치적 변수로 인해 지체되고 있다.
근년에는 특히 남북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상황이고 북핵 문제의 장기화로 9·19 공동 성명과 2·13 합의의 빛이 바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중요성을 다시금 새기고 이를 적극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영원히 평화통일의 기회를 남북 모두가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9·19 공동 선언과 2·13 합의는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하는 관건임에 틀림없다. 양 합의에 6·15와 10·4 선언 그리고 남북 기본 합의서 등을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면 반드시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북한과 한반도의 비핵화 실현으로 남북 간의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고, 동북아시아 다자 안보 체제가 구축되어 항구적인 평화가 올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이것은 6자가 공히 합의한 약속이다, 특히 부시 전 대통령도 재임 당시 이를 지지하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 역시 클린턴 정부 시절의 대북 정책 기조를 따를 것이고,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이미 '포괄적 패키지'를 언급하며 상당 부분 정책이 가시화되고 있다.
덧붙이건대, 이즈음에서 남북 간의 공조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6자의 틀 속에서 국제적으로 협력하되, 분단 당사자이자 앞으로 함께 살아야 할 남북 간의 공조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그동안 경색되었던 남북 관계가 풀리고 화해와 협력 그리고 공조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지난 4월 이슬라엘에서는 베냐민 네냐야후 강경 보수 연립정당이 집권하고 오늘 이란 대통령도 강경보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다시 집권하였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중거리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중동 지역에 근거한 하마스, 헤즈볼라, 알카에다 등 이슬람원리주의 테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9.11 테러는 역사상 최악의 대참사요 테러이다. 그 배후에는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끌고 있는 알 카에다 집단을 비롯한 하마스, 이슬람지하드, 헤즈볼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등 많은 극단주의 이슬람 단체 소행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원리주의는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
원리주의(Fundamentalism) 라는 용어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이슬람을 생각하게 되지만, 원래 이 용어의 어원은 20세기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서구에서 나온 것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독실하다 못해 광신적인 일부 신도들을 지칭하면서 쓰이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은 1940년대 들어서면서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이슬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기독교에서 나온 차용어이다.
- 장병옥의 이슬람과 테러리즘에서 참조한 글이다.
2. 이슬람의 위기 환경과 원리주의 운동의 발흥
1. 환경 및 속성
1) 지난 3세기 동안의 대내외적 수난
2) 서구 열강에 의한 이슬람의 쇠퇴
그리고 이슬람 운동의 특성로는
- 하층민, 중산층 등을 비롯한침투성과
- 리더가 한 사람이 아닌 다중심성
- 영속성 즉, 수세기동안에 걸쳐있고 다가올 미래까지도 생각하는 것들이 특성이라 할 수 있다.
3. 위기 환경과 원리주의 운동의 발흥
오스만 제국의 패망으로 이슬람과 아랍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와중에 이슬람이 추구하는 것은 유럽지배에서의 독립과 한법정부 수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가 조금은 실현되자 (2차 세계 대전 후) 그 자리를 이스라엘과 소련 미국이 파고들었다.
정체성 위기 ----------> 정부정책의 무능, 부정부패, 외세의존 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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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위기
문화적 위기 ---------->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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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 갈등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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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정치와 군사적 무능력 -----------> 급진과격극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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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 문화충돌
4. 이슬람 지하드와 테러리즘
1. 지하드
이슬람 교조 무함마드는 신의 존재를 부정, 다신론자가 신의 실체를 인정할 때 가지 싸우는 것을 비롯하여 침략자에 대한 방어, 사회정의, 퇴폐추방, 욕망절제까지를 지하드라 한다.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칼과 무기를 들지 않고 목적을 수행하여 결과를 얻는 것이다.
2. 테러리즘
테러의 기원은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때로 본다. 그 이후 그리스, 로마 시대와 이슬람 시대의 암살 행위를 거쳐서 강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폭력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로 제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제 3세계가 거수 제국주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독립투쟁과 PLO 같은 소수민족의 국가건설을 위한 투쟁의 도구로써 점점 급진화 과격화되었다.
5. 종교적 순교와 자살폭탄테러
사진출처: 연합뉴스
1. 무슬림 순교의 기원
무슬림은 수세기 동안 지하드라는 명목 하에 자살을 서구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자살 테러를 단순히 종교적 광신자들로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리고 자살테러를 종교지도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대체로 자살행위는 순교행위로 그 기원은 13세기 카르발라 전투이다. 680년 제 1대 이맘인 알리의 아들로서 제 3대 이맘이 된 후세인과 알리의 아내이자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는 화해의 제스처가 되리란 희망으로 수니파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어떠한 화해도 불가능하며 그와 그의 동료들이 수니파와의 전투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내용 꿈을 꾸었다.
그 후 제 3대 이맘 후세인이 폭군 야지드의 대 군사에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가하고 순교하였다. 이 순교의 날을 기리기 위하여 이라크와 이란 지역에서는 카르발라 - 후세인 가의 묘가 있고 시아파들의 성지이다- 축제에서 매년 열정적인 추모 연극과 대중의 애도 행렬이 이루어진다.
2. 자살 폭탄 테러와 순교
종교와 테러가 오랜 시간 동안 상관관계를 지녀 왔던 중동의 전통적인 폭력성을 뒤로하고라도, 종교적 광신주의의 팽배가 전 세계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성은 그 범위와 목표의 선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치명성과 무차별적인 특색에 있어서도 전례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많다. 즉, 천년왕국을 앞당기기 위해 일본의 사교인 옴진리교는 1995년 6월 동경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유출 시켰다. 또한 ‘세이크 라흐만’의 알-잠마아 알=이슬라미야‘의 추종자들은 맨해탄의 세계무역센터에 폭탄 테러를 가함으로써 대혼란과 공포를 유발했으며, 더 나아가 뉴욕의 중요한 시설물을 폭파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9.11 테러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가 일치하는 측면에서 무슬림 테러 집단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헤즈볼라나 하마스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행동한다. 그리고 몇몇 수니파 집단들은 최근 시아파의 순교와 같은 자살 폭탄 테러 공격을 그들의 주요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 집단이 순교에 호소하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높아진 위협감에 의해 설명될 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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