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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13 한국의 이슬람과 처용가



 

경주시 남쪽 외동읍에 괘릉이 있다. 이 능은 신라 제 38대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20대 후손이다. 괘릉을 무인석상 한 쌍이 수호하고 있다. 곱슬한 머리카락과 길게 글게 드리운 구레나룻, 움푹파인 큰 눈 우뚝 선 매부리코, 우람한 체격 등 어느 모로 보나 전형적인 아랍인의 모습이다. 단국대 정수일교수는 어쩌면 이보다 더 일찍이 한국과 아랍세계와의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신라에 관한 기록과 더불어 아랍인들이 정착하였다는 사실이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쓜라이만은 중국과 인도소식(851) 에서 신라가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고 아불피다 같은 지라학자는 신라의 경도와 위도까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지리학자 마끄디는 ‘창세와 역사서’(966) 에서 중국 동쪽에 신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이 양순하기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라고 적고 있다.


특히 신라의 향가인 처용설화의 처용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재미있는 주제이다. ‘삼국사기’ 에서 처용의 일행이 어느 날 동해에 나타난 모습과 의상이 이상한 네 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400년 후 기록된 ‘삼국유사’ 에서는 처용이 동해의 용의 한 아들로 둔갑하여 주술이 함께하는 설화로 윤색된다. 9세기 신라시대에 최대의 무역항 울산에 나타날 수 있는 낯선 외국인이라면 누구였을까? 지중해로부터 홍해, 인도양을 거쳐 서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누비던 아랍-무슬림 중의 몇 사람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찍이 아랍 땅을 찾아간 신라의 고승 혜초는 ‘왕오천축국전’ 을 남겼다. 그는 727년 경 구법차 천축, 즉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식 즉 아랍을 방문하였다. 이 견문록은 8세기 서역에 관한 기록 가운데 단연 최고의 진서로 인정되고 있다. 더욱이 신라와 아랍간의 교역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상당수 발굴되고 있다. 아랍산 항료, 각종 유리 기구, 구슬과 기호품 등이 신라와의 고분과 사찰에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아랍상인들이 대거 올려오고 말엽에는 이슬람을 적극 수용했던 원나라를 통해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최초로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고려사’ 나 ‘고려사절요’에 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나 무슬림은 일컫는 ‘회회인’ 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 에 1024년과 1025년에 아랍상인들이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수은, 몰약, 소목과 같은 방물을 가지고 개경을 찾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왕들은 그들에게 숙소를 마련하여 후대하고 돌아갈 때는 금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고려말에는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는데 원나라를 통하여 ‘문화교수’ 의 특수한 위치는 지니고 고려에 사신, 역관, 서기, 근위병, 시종무관 등이 파견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고려에 잔류하여 귀화하고 동화된 무슬림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삼가 장순룡이다. 삼가는 충렬왕의 몽골비인 제국 공주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다. 원나라에서도 고관을 지낸 인물로 고려에서도 높은 지위까지 올랐고 개성의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고려인과 결혼하였는데 그가 바로 덕수 장씨의 시조이다.

몽고 통치시기에 고려를 찾은 무슬림들은 특히 귀화한 무슬림들은 이슬람 전파와 정착에 힘썼을 뿐 아니라 고려 사회에도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에 이르는 약 150년간은 원나라에서 유입된 무슬림들의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일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개경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 취락을 이루고 집단 거주하며 고유의 생활양식과 종교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 사원격인 예궁에서 예배를 들렸을 뿐 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예배의식을 행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맥을 이어 이슬람과의 만남이 한층 깊어 졌다. 그러나 조선 중기, 후기를 거치면서 원나라의 쇠퇴 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 만남이 단절된다. 조선왕조신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회회인들의 정착과 사회활동과 지위에 대한 기록이 있다. 1470년 회회사문, 이맘 인 도로에게 집을 주어 살게 하고 여러 가지 특전을 베풀었다. 세종실록에도 무슬림들은 조종에서 특별한 배려 속에 살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관계와 상술에 능한 무슬림들은 조정과의 관계에 특별히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들은 그들의 특유의 복장을 하고 이슬람식으로 궁정의례를 치렀으며 승려들과 동동한 서열로 조종하례에 참석하였다. 그러나가 세종 때에 동화된 무슬림들에게 이방적인 행태를 금하도록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슬람 과학 기술으 수용이다. 이슬람 역법의 도입, 천문학의 도입으로 천문기상학과 천문관측기기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공예기술에서도 도자기의 청색 안료인 회청의 도입으로 백자가 주종을 이루다가 세종 때 와서 청화백화가 만들어 진다.

조선의 쇄국정책과 한국의 이슬람의 관문이었던 중국의 무슬림 탄압정책으로 이슬람 같은 이질 문명을 경원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조 말기 개화정책으로 이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된 것은 1920년대부터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세비키 혁명으로 투르크계 망명자들이 만주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약 200여 명이 일제의 도움으로 각종 생업에 종사하다가 1945년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해외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 때 그들과 일하던 몇 몇 한국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는데 현대 한국의 초창기 무슬림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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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의 본고장 울산시 남구 황성동의 처용바위


특히 한국전쟁 시에 터키군이 참전하면서 조직적인 선교가 이루어 졌으며 현재 한국 이슬람 공동체의 바탕이 되었다. 1955년 9월에 한국인들에 의해 이슬람협회가 결성된다. 1970년대 중동 건설노동자들이 귀국하면서 한국 무슬림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1976년 이태원에는 이슬람 중앙 사원이 건립되는데 터키군이 한국전쟁 당시 기도하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무슬림을 3만 5천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며 1990년대 들어서 이슬람국의 각 이주노동자들 6만 여 명을 포함하여 약 10만명의 신자가 있다(조선일보 2005.12.19)

현재 부산, 경기도, 광주, 전주, 안양, 안산, 파주, 부평 등 9곳의 사원과 50여개의 임시 예배소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 무슬림과 결혼하기 위해서 신자가 되는 한국 여성들(연간 1,000-2,000명) 과 자발적으로 이슬람에 입문하는 신세대가 조금씩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따가운 시선과 오해로 인하여 자신이 스스로 무슬림임을 공개하기를 꺼리고 있다. ( 일부에서는 조선일보와는 달리 무슬림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약 2~만3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부영 목사의 글을 요약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 이슬람은 마호메드에 의해 6세기 경 창시되었다. 9세기 혹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한반도와 무역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류가 시작되었고 불교가 국교인 신라가 이슬람을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는 물론 고려를 거쳐 조선의 세종 때가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 특히 개신교와 이슬람은 대단히 불안하고 적대적 관계다. 이스라엘과 아랍을 비록하여 미국과 중동과의 관계가 그렇고 한국 땅에서도 이슬람포비아를 거론하여 개신교회들이 경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하는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세계 도처의 분쟁 중에 종교 문제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종교 간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완화하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는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종교가 중요한 건 당연하지만, 상대의 종교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야말로 화이부동과 구존동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석유 에너지를 대부분 중동에서 들여온다. 그 나라와 종교 문제로 인해 계속 첨예한 갈등을 빚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내의 정유사들이 오히려 아랍에 대해 공부하고 있고 중동의 건설기업 등도 상당수 진출하였다. 뿐 만 아니라 월드컵 유치라든지, 올림픽 유치라는지 국제무대에서 중동 또는 아랍권과의 협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한 국가는 특정 종교문제로 정치, 외교적으로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중동 땅에서는 한국의 개신교 선교에 대해서 경계를 하고 있고 그것이 몇 해 전에는 전세계의 탑 뉴스가 된 적이 있고 국내에서도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자신의 정체성은 지키되,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다. 상대와 끝임없는 갈등, 증오 대결로 치닫는 것은 미련한 행동이다. 그로한 행동들이 인류 역사에 얼마만한 비극을 불러 일으켰는지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지혜가 필요한 시대이다.

이글은 안산중앙교회 오부영 목사의 글을 요약하고 후반부에 커멘트를 달았다.

김기환



'처용가'


셔블 발긔 다래                      東京明期月良                  

밤 드리 노니다가                    夜入伊遊行如何                

드러와 자리 보곤                    入良沙寢矣見昆                

가라리 네히어라                     脚烏伊四是良羅               

둘흔 내해엇고                       二盻隱吾下於叱古              

둘흔 뉘해언고.                       二盻隱誰支不焉古             

본데 내해다마는                     本矣吾下是如馬於隱            

아사날 엇디하릿고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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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에 대해 내가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책임을 다 하고자 하고
북한과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 그리고 작은 봉사를 공동체와 함께
일구어 나가고자 그저 소박함으로 하루을 일하고자 한다.
2009/05/13 01:07 2009/05/13 01:07
Posted by 김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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